어느 갤럽조사에서 ‘극락이나 천국은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는 대답이 63.4인 것으로 나와 국민의 현세 중심적 사고가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류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상세계를 꿈꾸어왔다. 그곳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동양에선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와 신선들이 사는 선계를 동경했다.
19세기 독일의 서정시인 카를 부세(Carl Busse)는 자신의 시 ''저 산 너머‘(Over the Mountains)에서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기에 그 말만 듣고 남들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 왔네”라고 했다.
니체는 1881년 여름, 알프스 산중에서 산책하다가 갑자기 번개처럼 영원회귀 사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영원한 시간은 원형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우주와 인생, 일체의 사물과 인식이 그대로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생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질인 수소와 산소가 모여 전혀 새로운 물이 출현하면서 신비로운 형이상학이 된다. 이 신비의 과정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창조’라고 표현하고, 불교에서는 연기라 부른다.
흔히 생명은 유한한 삶을 산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체로서의 생명일 뿐, 전체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를 이어가는 한 죽음은 없다. 생명의 유전자가 이어지는 한 생명은 영원하다.
자기 인식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개체의 유한한 삶에 대한 강박감도 내려놓을 수 있다. 자기가 사라지면 죽게 될 자기도 없어지고 따라서 죽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을 내려놓아야 세상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본래 이 세상은 아름다운 천국이다. 그 천국에서 소풍을 즐기는 것이 인생이다. 장자의 ''소요유''도 멀리 소풍 가서 영혼을 정화시키며 놀면서 절대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에게 긍정 마인드를 깊이 심어준 위대한 시인 천상병은 모진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천국을 살았다.
프랑스 가르멜 수도원의 성녀 엘리사벳은 이 세상에도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찾았습니다. 천국이란 하느님이고 하느님은 내 영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0-21),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루카 18, 16)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된 신자가 죽은 후 그 영혼이 가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사후의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을 말하며, 현세에도, 또 인간의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이 세상이 천국이다.
글 _ 윤여환 요한 사도(충남대 회화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