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치 못한 저를 수도자로 불러주셔서 당신 도구로 쓰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머나먼 카자흐스탄에서 무료 병원과 행려자 식당을 운영하며 현지 국민에게 나눔의 모범으로 사랑받아온 김창남(디에고, 작은형제회) 수사가 선교활동을 마무리하고 최근 귀국했다. 김 수사는 16일 만난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공을 하느님께 돌렸다.
쉰 넘은 나이에 새로운 임지로 떠나
그가 수도회 총본부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선교를 시작한 때는 1993년 11월. 김 수사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동체에 도착하자마자 주저 없이 현지 의사와 간호사 수녀들과 함께 무료 진료소를 개원했다. 비싼 의료비 탓에 기본 진료조차 못 받고 있던 현지 사람들을 위한 발 빠른 결정이었다. 1941년생인 그가 비교적 늦은 나이인 쉰이 넘어 떠난 선교였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컸다. 당시 한국에서도 한센인 공동체 ‘성심원’ 원장과 한센인 자녀가 모여 사는 ‘요한 23세 소년마을’ 시설장을 맡으며 소외된 이들과 늘 함께했던 터였다.
현지 진료소에서는 수지침·부항·뜸과 같은 한방요법을 시행했다. 그만의 노력으로 외과 의사들도 수술해야만 살 수 있다는 여러 여성 질환을 치료해냈다. 30명 넘는 불임환자가 생명을 낳도록 도운 것도 그였다. 김 수사의 생명을 일으키는 실력은 삽시간에 입소문을 탔다.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치료를 원하는 많은 환자들로 진료소는 늘 문전성시였다. 그에게 진료받은 이들만 수만 명에 달한다. 매주 한 번씩은 시골 무의촌 구석구석 진료를 다녔다. 그런 와중에도 김 수사는 “환자들에게 가톨릭교회에 대해선 절대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순수하게 치료가 목적이었기에, 관심을 표명하면 친절히 설명해주는 정도였다.
1998년에는 행려자를 위한 무료 식당을 열었다. 당시 카자흐스탄에서는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인가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런 관행이 없어 서류도 새로 만들어야 했고, 몇 개월 안에 문 닫을 거라는 눈총까지 받으며 시작했습니다. 행려자 식당은 지금까지 25년 넘게 이어오고 있지요.”
카자흐스탄 가난한 이들에게 주님 사랑 전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김 수사의 뜨거운 사랑은 현지 국민 전체를 감동시켰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그의 공적을 인정해 수여한 메달만 20여 개에 이른다. 2000년에는 카자흐스탄 명예 동양의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2010년 정부 의료공훈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엔 UN 평화대사에도 임명됐다. 2016년에는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2021년, 30여 년에 이르는 그의 모든 선행기록과 공적이 카자흐스탄 국가기록원에 공식 등재됐다. 외국인이 카자흐스탄 국가기록원에 등재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지금까지 카자흐스탄 국가기록원에 등재된 인원은 120여 명. 1만 명 가까운 현지의 내로라 할 의사와 교수들도 엄두 내기 어려운 명예의 전당이다. 당시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김 수사는 “늘 과분하다는 생각뿐”이라며 “복음을 전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가 떠나는 날 공항은 눈물바다로
그의 따스한 선행은 현지 고려인들까지 감동시켰다. 그의 모습에 매료된 고려인 130여 명이 세례받았다. 알마티본당에서 세례받은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그를 거쳐 주님의 자녀가 됐다. 김 수사는 “많은 일 중에서도 하느님 자녀의 탄생 순간을 본 게 가장 보람된 기억”이라고 했다.
김 수사는 여든을 훌쩍 넘기고 카자흐스탄과 함께한 30년 선교를 마무리했다. “떠나는 날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밤 11시 비행기였는데, 모든 교인이 공항까지 마중 나와줬습니다. 참 고마운 분들입니다. 지금껏 맡은 소임마다 힘을 주신 주님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평수사로 순종하며 살았던 삶이었고,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후배 형제들과 기도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예정입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