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한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고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그 유명한 ‘불판’ 발언을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진다며, 변하지 않는 보수 양당정치를 이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그의 말이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비례의원 8명을 당선시킵니다. 보수 일색의 국회에 진보정치라는 씨앗을 뿌립니다.
그 후 민주노동당이 정의당으로 변하는 동안 진보정치는 국민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민주노총의 산파 단병호 의원, 두루마기 한복을 입은 농민 강기갑 의원 등을 보며 보수 양당에 질린 국민들은 진보정치에 환호했습니다. 지금은 상식이 된 무상급식, 무상교육이 모두 진보정치의 산물입니다.
그러면서 심상정 의원은 지역구를 기반으로 4선 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데스노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의당은 몰염치한 거대양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삼성 엑스파일 공개로 재벌과 권력의 유착을 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대중정당이라는 진보정치의 꿈은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갑니다.
지난달 30일 제22대 국회가 정식 개원했습니다. 새롭게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가슴에 의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의원들은 정치 포부를 밝히며 앞으로의 역할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진보 정치는 다시 광야로 갑니다. 정권 심판론이 몰아쳤던 4월 총선에서 정의당은 1석도 얻지 못했습니다.
혹자는 정의당의 이런 결과가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정의당은 2중대이기 때문에 혹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뜻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정치 구조 안에서는 보수 양당과 타협하며 살아야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 정치는 거대 양당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보 정치는 권력의 높은 곳이 아니라 공동체의 아래를 향하며 시작되었습니다.
고 노회찬 의원은 서울 6411번 버스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노 의원은 존재하되 존재감이 사라진 이들이 그 버스를 탄다고 했습니다. 각자 이름은 있지만, 그냥 아주머니, 아저씨로 불리는 이들이 6411번을 탄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지워진 이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는 이들, 투명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6411번을 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6411번의 투명인간이 진보 정치를 찾을 때 과연 어디 있었는지 묻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대중 정당은 저 아래로 가야지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삶의 현장으로 간다는 권영국 신임 정의당 대표의 말은 인상적입니다. 권 대표는 “원외 정당이 된 건 소외된 사람 곁으로 가라는 엄명”이라며 “다시 노동자와 민중 곁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권 대표의 말대로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진보 정치는 시작해야 합니다. 투명 인간으로 사는 이들 곁에는 진보정치가 있어야 합니다. 위가 아닌 저 아래에 진보 정치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사제의 눈 제목은 <노회찬, 권영국 다시 6411번 >입니다. 숨 고르기에 들어간 진보 정치가 새롭게 부활해, 이 땅의 투명 인간들에게 희망과 꿈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