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학교에 식구가 하나 늘었습니다. 귀엽게 생긴 시바견입니다. 학교 정문 앞 비어 있던 개집에 낯선 개가 묶여있는 것을 보고는 신부님들께 웬일인지 물었죠. 그 녀석이 그냥 어느 날 학교 안을 서성이고 있었고, 사람을 잘 따르길래 잃어버린 개려니 하고 CCTV를 돌려보니 웬걸, 정문 안쪽에 버려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답니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지 털이 듬성듬성 빠져있었죠. 그런데 이 가여운 것이 글쎄, 미소 짓는 법을 알고 있는 거예요. 다가가는 학교 식구들을 어찌나 귀엽게 웃으며 맞이하던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 중에 첫 번째로 꼽은 것이 웃음이었는데, 그가 이 미소를 봤더라면 이 개를 사람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그렇게 이 시바견은 ‘겨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식구가 되었습니다.
봄학기가 시작하고 신학생들이 기숙사에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은 새로 생긴 식구에게 많은 관심을 주었습니다. 번갈아 산책도 시켜주고, 닭가슴살 고급 간식도 슬쩍 먹여주고, 털도 빗겨주곤 했습니다. 겨울이도 학생들과 조금씩 친해지는 듯했고, 옛 주인에게 버림받은 아픔은 모두 잊은 듯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학기 초 수업 준비로 겨울이를 잠시 잊고 지냈었는데, 학생 수녀님들이 “겨울이가 집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네” 하시는 것을 듣고는 산책하다 가보았습니다. “겨울아~”하고 불러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웃음이 사랑스럽던 그 피조물은 그렇게 축 처져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겨울이를 향한 학교 식구들의 사랑이 더 진해졌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번씩 쓰다듬고들 하더군요. 저는, 음, 더 이상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왠지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네 어둠도 만만찮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는 제게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웃음을 찾는 너는? 네 웃음은 어디에 있니?’
저는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2년 차 교수 신부입니다. 작은형제회 수도자이고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학교로 부임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의 삶은 걱정했던 것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참 많이 다른 환경으로 옮겨왔다는 것도 잊은 채 새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신부님, 강의 영상 봤는데, 그게 몇 년전이에요? 이땐 참 활기 있고 웃음이 많으셨네요?”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 마음속 어둠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하던 시절엔 힘들긴 했어도 내 마음이 갈라져 있지는 않았는데, 그분께로 온전히 향해있던 내 마음이 어느새 이렇게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선뜻 ‘다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무슨 다른 맘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닌데, ‘해야 하는’ 일들만 처리하면서 비상사태인 양 살다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일까. 사랑하는 법을 잊었나. 그러다가 겨울이의 쓸쓸한 눈을 피하는 지경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났고, 겨울이는 식구들 사랑을 듬뿍 받아 건강한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피부병도 다 나아 털이 빠졌던 곳도 깨끗해졌습니다. “우리 학교가 치유가 일어나는 보금자리구나!”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저는요? 오늘 마음이 살짝 열린 틈을 타서 고해 신부님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겨울이처럼 단순해지긴 어렵겠지만, 하느님이 단 한 분이심을 기억하며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봅니다. 철학 일기, 이렇게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