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속에서 신분과 국적을 넘는 우정을 남긴 안동교구 박상근(마티아) 복자와 칼레(Calais, 안동교구 명칭은 ‘깔래’) 신부가 감동적인 ‘해후’(邂逅)를 했다. 124위 복자 기념일인 5월 29일 각각 한국과 프랑스에 살던 후손들이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진 경북 문경 땅에서 상봉한 것이다. 1866년 박해를 피해 칼레 신부가 박상근과 작별하고 조선을 떠난 지 158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 만남이다.
두 선조의 후손들은 이날 안동교구 마원성지에서 ‘박해 속에 핀 우정, 160년 만에 다시 만나다’를 주제로 복자 박상근 기념 미사를 봉헌했다. 마원성지는 박상근 묘가 있는 곳으로, 복자와 칼레 신부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미사에 참여한 칼레 신부 후손은 형(도미니크 칼레)의 증손녀 부부와 증손자 부부, 외증손의 아내 그리고 동생(샤를 프랑수아)의 증손녀 모녀 등 7명. 일부는 지금도 칼레 신부 고향인 크리옹(Crion)에 산다. 박상근 복자 후손으로는 둘째 형의 고종손 박태진(바오로)·박현자(마르가리타)·박현주(보나)씨가 참여했다. 이들은 국내 명인이 제작한 전통 도자기를 칼레 신부 후손들에게 전했다.
칼레 신부 후손들도 안동교구에 ‘뜻깊은’ 선물을 전달했다. 칼레 신부가 고향으로 보낸 서한 70통 중 조선 선교에 관한 내용이 충실한 2통이다. 하나는 1862년 10월 21일 미리내에서 크리옹본당 신부에게 부친 편지로, ‘한 해 동안 1350명이 고해성사를 받는다’는 등 구체적 사목 내용이 적혀있다. 또 한글로 표기한 ‘찬미 여수(찬미 예수-여수는 예수의 음역어인 야소(耶蘇)를 우리 식으로 읽은 것)’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특히 찬미 예수는 1861년 한국 교회에서 처음 칼레 신부가 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사실이 이 편지로 증빙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칼레 신부가 병인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피난한 이후인 1867년 5월 5일 상해에서 친척에게 보낸 편지다. 박해 당시 조선 신자들이 어떤 고초를 겪으며 순교했는지 상세히 기술했다. 이들 서한은 교구 역사관에 마련된 칼레 신부 전시관에 비치될 전망이다.
미사를 주례한 성지 담당 정도영 신부는 “박해 속에서도 조선 신자들은 이국 땅에서 목숨을 내놓으며 기도하는 선교사들의 사랑 덕에 행복했다”며 “선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베르뇌 주교 편지를 보면 ‘조선에서 선교하는 것이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프랑스에선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쓰였다”고 말했다.
후손들은 복자와 칼레 신부가 처음 만난 한실교우촌이 있던 터로 알려진 한실성지도 방문했다. 이튿날인 5월 30일에는 ‘우정의 길을 함께 걸으며 박상근과 칼레 신부의 동행도 체험하고, 여우목성지도 탐방하는 등 160년 전 선조들의 신앙을 공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