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도 유명한 만화 배트맨에서 주인공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사는 고담시의 악당과 싸웁니다. 구약 성경의 소담과 고모라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고담시는 범죄의 소굴입니다. 무엇보다 범죄자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경찰과 검찰마저 부패해 있는 곳이 고담 시입니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박쥐로 분장하고 범죄에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범죄와 싸우는 브루스 웨인은 스스로를 앙갚음한다는 ‘복수(I’m vengeance)’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배트맨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배트맨이 악당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나오고 배트맨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당이 되어 버린 이들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배트맨은 언제나 고민합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악과 선인지 말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활동한다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2004년 경남 밀양에서 44명의 남학생이 여자 중학생을 집단 성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밀양을 포함한 전국이 충격에 빠집니다. 하지만 사건에 연루된 44명의 남학생 대다수가 소년부로 송치돼 보호관찰 처분 등만 받는 등,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하고 수사는 종결됩니다. 그렇게 사라지는 듯한 사건은 정확히 20년 뒤 사람들의 기억에 다시 떠오릅니다.
최근 한 유튜브 채널이 일명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관계자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가해자를 편든 이도 공개됐습니다. 방송에서는 과거 사건을 취재한 영상을 공개하며 사람들의 분노에 함께합니다. 공개된 가해자들은 직장에서 해고되기도 하고 일하던 가게는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가해자들을 공개한 유튜버는 44명 전원을 공개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이처럼 공권력이 아닌 개인이나 집단이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사적 제재’라고 부릅니다. 밀양 성폭행 가담자 신상 공개처럼 사적 제재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되어 보입니다. 통쾌함이 들기도 합니다. 유튜버가 수사기관보다 낫다며 응원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나 ‘롤스로이스 차량 돌진 사건’처럼 신상털기식 사적 제재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적 제재는 온전히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식의 행동은 위험합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뿐입니다. 엉뚱한 이를 피해자로 둔갑시켜 2차 피해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명분이 좋다고 하지만 배트맨의 고민처럼 스스로 또 다른 악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적 제재가 늘어난 배경에는 사법 시스템의 불신이 있습니다. 국민 상식에 맞지 않는 판결이나 사회 고위층의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나 재판이 한없이 지연되는 모습들을 보며 시민들은 고담 시의 배트맨이 되기로 합니다.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니 스스로 ‘심판자’로 나서는 겁니다. 결국 ‘사이버 자경단’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우리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 [사제의 눈] 제목은 <밀양 성폭행 가해자의 죄와 벌>입니다. 약자들이 보호받고 가해자들이 합당한 벌을 받는 세상이 되길 바라며 오늘도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