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누군가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이유를 ‘힘들 때 곁에 있어 줘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꽤 있다. 딱히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함께해 줬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누군가를 소중하다고 느낀다.
고(故) 정일우 신부의 10주기를 추모행사를 취재하며 알게 된 그가 존경받는 이유도 그저 ‘빈민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함께한 방식은 그들처럼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다. 빈민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의 성격이 원체 소박하고 털털하기도 했다. 술 한잔 기울이길 즐겼고 함께 잠들고 일어났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허술한 판자촌 한가운데서 단출한 한복을 입고 사람들과 즐기고 웃다가도 기득권층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 자체가 그의 방식이었다.
물론 성과도 많았다. 철거된 판자촌 빈민들을 이끌고 이주해 복음자리마을, 목화마을을 건립했다. 하지만 정 신부를 사랑하는 건 이주에 실패한 상계동 판자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철거로 고통받을 때 끝까지 함께했기 때문이다. 판자촌 주민들은 이런 그가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했다.
귀담아듣는 것이 어색하고 결과물을 중시하는 요즘이다. 동시에 친구든 지인이든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우리가 함께해 줘야 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 그런 면에서 정일우 신부는 요즘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일 수 있겠다. 거창한 게 아닌 그저 이웃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하다 ‘먹보요 술꾼’(루카 7,34 참조) 소리를 들었던 예수님 그리고 ‘내 친구 정일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