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학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과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학부 때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오, 글 잘 쓰겠네!”였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지도 교수님께서 국문과는 글을 잘 쓰는 학생들이 모인 과가 아니라 문학을 해석하고 연구하는 곳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위 논문을 맞닥뜨리면서 글쓰기는 산고(産苦)에 견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실제로 저한테는 아이를 낳는 것보다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 훨씬 더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출산은 기간이 정해져 있고 아기는 낳아서 기르면 되지만 학위 논문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완성된 형태로 세상에 내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앙단상’을 집필하면서는 기존의 글쓰기와는 다른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주말에 있는 대학원 수업을 핑계로 소홀히 했던 미사에 정성을 다해 임했으며 짧게라도 매일매일 복음 말씀을 묵상했고 책장에 꽂아 두었던 영성 서적들을 찾아 밑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읽어 보기도 했습니다. 또 벽장 속에 보관해 둔 사진첩들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지금까지의 신앙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중년이 되면서 청년 시절처럼 적극적으로 교회 내에서의 봉사 활동은 못 하고 있지만 하느님을 향한 제 사랑과 열정은 결을 달리하여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청년 시절에는 자유 기도를 선호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원 없이, 마음껏 쏟아내면 속이 뻥 뚫리고 예수님께서 제 말을 곧 들어주실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교회 공동체의 기도문이 마음에 더 와닿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바칠 기도문을 만들고 쓰는 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도와 묵상, 시간이 걸렸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하루하루 새롭고 사도 신경은 외울 때마다 예수님의 삶을 되짚어 보게 하며 성무일도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5월과 6월 두 달간 ‘신앙단상’을 연재하면서 지인들로부터 “진정성 있는 글을 쓰더라”, “나를 성찰하게 하는 글이었어” 등 칭찬과 격려의 말도 들었고, “언니답지 않게 문장이 팔딱팔딱 뛰지 않아요. 글이 너무 정제되어 있어요”, “글이 너무 계몽적이야, 꼭 뭔가 한 가지씩은 가르치려고 하더라” 등 앞으로 저의 글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도 들었습니다.
평소의 저라면 제 글에 대한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의 널을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주 어떤 소재로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 때마다 미리 저의 상황을 아시고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시는 ‘야훼 이레’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무사히 ‘신앙단상’의 여정을 마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이처럼 아름다운 계절에 하느님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혜진(베로니카, 성균관대 학부대학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