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운영하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상을 받았다. 「교리문답서」에 있는 499개의 질문과 답을 모두 외웠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면 신자가 아닌 동료 학생들과 학교 직원들이 하느님과 신앙, 가톨릭교회에 관해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답할 자신이 있었다. 어쨌든 「교리문답서」 질문과 답을 모두 외워 상도 받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새 학교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충격은 이후 나의 신앙과 사목 활동에 변화를 줬다. 「교리문답서」에 있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가톨릭신자로서 내 손때 묻은 「교리문답서」에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훈련받은 셈이었다.
대신 학교 친구들이 물어온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왜 신을 믿어?’, ‘너의 종교가 다른 이의 종교보다 나은 점은 무엇이야?’, ‘너희 그리스도인들은 왜 나의 부모님을 포함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집단 수용소에 가둬 죽였어?’ 등이었다. 「교리문답서」는 내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안에서 다른 질문들이 나왔다. ‘이 훌륭한 아이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도 어떻게 나보다 더 착한가?’, ‘내 친구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 ‘세례받지 않은 내 친구들은 모두 저주받은 것일까?’, ‘가톨릭신자에게는 과연 특별한 것이 있을까?’, ‘나는 왜 하느님을 믿을까?’, ‘아담과 하와는 또 어떤가?’, ‘교회에 가는 것은 우리 집의 전통인가?’ 등이었다.
내가 성숙해지고 과학과 역사, 사회, 심리학, 문학, 성경, 신학 등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해 더 알게 되면서, 더 많은 질문들이 생겼다. 계속해서 더.
오랫동안 몇몇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찾아냈다. 그리고 몇몇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또 몇몇 질문들은 터무니없다는 것도 알아냈다. 내 삶에서 작용했던 답들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작용하지 않았고,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몇몇 답들은 또 무의미했다.
어린 시절 접한 「교리문답서」
499개 모든 질문과 답 외웠지만
세상 직면한 문제에 답은 없어
새 지식에서 나오는 질문들
옛날 해답만으로 충분치 않아
복음 증거 위해 더욱 소통해야
내가 배웠던 「교리문답서」와 교회가 가르침으로 제안하는 많은 것들은 세상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며 모든 답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방법을 찾아 헤맨다.
교회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이들은 너무나도 자주 무엇이 질문인지 단정하고 이미 만들어진 답을 한다. 마치 내 오래된 「교리문답서」처럼 질문에 맞춰 해답을 내놓는다. 이 답들이 틀리진 않지만, 누구도 묻지 않는 답이며, 종종 진짜 질문을 빠뜨리거나 언급을 피하고 무시한다. 이 진짜 질문들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하도록 주님께서 주신 기회다. 복음은 사람들의 삶과 세상에서 생기는 나쁜 소식에 대한 깊은 응답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호함에 맞닥뜨리는 것을 꺼리고 질문을 파악해 답을 찾는 과정을 피하는 것이 종종 문제가 된다. 기자들이 자주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거치는데, 예를 들면, 이들은 주교나 교구청 관계자들에게 다가가 그날 아침에 발표됐던 행사 등에 대한 반응을 묻는다. 여기서 유감스럽게도, ‘모른다’거나 ‘잘 알지 못한다’는 등의 정직한 겸손의 말은 드물다. 물론 기자들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해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는 모든 질문을 다 알지도 못한다. 새로운 질문에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된다. 또한 예전의 좋은 답들이 새로운 질문에 대해서도 좋은 답이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게 해서도 안 된다.
특히 과학과 기술과 관련한 사안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새로운 질문은 종종 새로운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새로운 연구와 사고에 기반하지 않는 옛 해답은 충분치 않으며, 사려 깊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할 뿐이다.
현대 사회과학을 존중하며 알고자 노력하는 일은 우리가 만나는 질문에 깊은 영감을 줄 수 있다. 진솔한 역사 공부는 옛 해답의 맥락을 파악해 우리가 현대의 문제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연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오늘날 세상의 진짜 문제에 대해 듣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말이다.
글 _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