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게 도시를 감싼 회색빛이 오랜 역사에 걸쳐 도시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풍경.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채에서 알레포를 내려다봤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신비로운 회색빛은 눈덩이라도 흩뿌려놓은 양, 화창한 하늘과 초록 풀 사이로 산재해 있던 연회색 돌들로 도시가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2011년 겨울이 봄으로 바뀌던 무렵 시리아의 알레포, 아랍어로는 할랍(halab)에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마을 중 하나를 지나쳐 외곽에 있는 시메온 성인의 유적지로 갔다. 1500여 년 전 군중들의 맹목적 추앙과 권력자들이 주는 달콤한 영예를 피해서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 고행을 이어간 시메온 성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성인이 올랐떤 기둥 주위에 세워졌던 거대한 교회는 이제 폐허가 돼버렸지만, 높은 연회색 돌기둥 위에서 군중을 내려다보며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설교했을 고행자는 왠지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성전을 꺼렸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시메온 성인 유적에 비해 훨씬 젊기만 한 대(大)모스크는 탁 트인 안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는 어머니들, 벽에 기대서 쉬거나 기도하는 사람들을 담아 안은 채 알레포 시내를 1200여 년간 지키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모스크 안에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유해 일부를 모셨다고 하는 성인의 무덤이 있어, 그리스도교, 이슬람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찾아와 청원을 드린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알레포에 오기 전 한 달여간 머물렀던 디마슈크(Dimashq), 즉 다마스쿠스에서는 우마이야 모스크 안에 있는 요한 세례자의 무덤을 방문한 터였다. 그뿐인가. 사울을 사도 바오로로 다시 태어나게 한 기적적 낙마사건이 일어났던 그 거리를 걸어도 보고, 바오로 사도가 세례받았다는 하나니아 교회에 앉아 성경 속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했으며, 아직도 예수님의 아람어로 미사를 봉헌하는 마룰라의 수도원과 교회들도 눈과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시리아에 머무는 한 달 반 남짓, 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역사와 하느님 백성들이 살아온 다채로운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에서 시간과 공간 감각이 어그러진 채,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묘한 기분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시리아를 떠나기 얼마 전부터 시위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시리아를 떠난 지 두 달 후 시위 소식은 내전 뉴스로 바뀌었고, 조금 더 지나자 국제전 양상의 전쟁 소식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알레포 대모스크의 첨탑은 허리가 부러져서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한때를 선사하던 안마당에 흩뿌려졌고, 폭격으로 깨지고 건물에서 찢겨나간 회색 잔해들은 도시를 우울한 잿빛으로 뒤덮었으며, 일부 남아있던 시메온 성인의 돌기둥도 기단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전쟁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어요.” 뉴스 속 폐허가 된 알레포에서 한 노인이 던진 말은 묵직했다. 다시 갈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시리아 땅, 그 사람들의 영혼만큼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길 기도드린다.
송영은(가타리나,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