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자들은 저를 만나면 “교회사는 맨날 박해사·순교사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요. 순교자들은 대단하신데 막상 그분들의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 같고요”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있는 사람이니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고 그런 말씀을 남다른 마음으로 새겨듣습니다.
흔히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가면 다른 음식과 다른 주거 문화를 경험하면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합니다. 최근 들어 이런 콘텐츠로 만든 방송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국 음식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가서 식당을 열기도 하고, 국내에 여행 온 외국인에게 한식과 한옥을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들이 다양한 포맷으로 만들어져 방송을 타고 있습니다.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케미도 즐겁지만,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외국인들의 반응이 더 재미있습니다.
최근 연구소는 교회사를 문화로 읽어내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새롭게 보이는 매력적인 주제가 ‘의식주’입니다. 신앙 선조들이 먹던 음식, 입던 옷들 그리고 살던 집을 호기심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선교사의 편지를 읽다 보면 영화처럼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박해 시대에 경기도 손골에 살던 이군옥 요셉은 전임 선교사들에게 빵 만드는 법을 배워 새로 오는 선교사들에게 빵을 구워주었답니다. 1865년 조선에 입국한 도리 신부는 그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그가 만든 빵을 큼직한 개고기와 먹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는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도 신자들과 참외파티를 열기도 했습니다. 주교는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 “해질 무렵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는 나무 밑으로 가면 남자 교우들이 옆으로 모여들고 우리는 돗자리에 앉아 야식 잔치를 벌이기도 합니다. 어쩌다 제가 순박한 교우들에게 한턱 내는데, 참외 200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 참 즐겁습니다”라며 박해의 두려움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행복했던 순간을 회상했습니다.
다블뤼 주교와 같은 날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으로의 파견이 결정된 후 상투를 틀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이후 계속 기른 제 머리는 여전히 짧아서 신자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긴 머리카락을 덧붙인 다음 머리를 위로 올려 아주 멋지게 매듭을 지었습니다.”
미리내성지에 묻혀 계신 페레올 주교는 조선의 신자들이 궁핍하게 살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다며 금육(禁肉)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관면(寬免)을 요청했습니다. “신자 대부분은 아주 가난해서 땀 흘려 일을 해야만 양식을 얻습니다. 관면을 청하는 이유는 이들이 아주 드물게 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처럼 먹을 기회가 왔는데 금육을 지키려면 아무것도 못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활사로 교회사를 들춰보면 순교자들이 내 할머니·할아버지처럼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갈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관계 안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나를 죽이고 상대방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순교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신앙을 증거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은 준비 없이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침반을 온전히 맞추고 깨어있어야 그때가 보입니다. 그 순간을 잘 볼 수 있는 깨끗하고 넓은 영혼의 창문을 열어주시기를 성령께 간절히 청합니다.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