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선교하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이 돼달라”고 당부하는 참된 목자
8월 28일 98세를 일기로 선종한 박정일(미카엘) 주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여러 기록을 갖고 있다.
박 주교는 한국 교회에서 3개 교구(제주ㆍ전주ㆍ마산) 교구장을 지낸 유일한 주교다. 또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단독 추진한 124위 시복시성 소송을 책임졌던 주교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가장 먼저 ‘피데이 도눔’(Fidei Doum, 사제가 부족한 지역에 교구 사제를 한시적으로 선교사로 파견하는 제도)을 도입한 주교다. 그리고 한국 교회 사도좌 정기방문 및 세계성체대회에 가장 많이 참석한 주교다.
박정일 주교는 평소 교우들을 만나면 “늘 선교하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이 돼달라”고 당부하는 참된 목자였다. 그러나 정작 2015년 3월 사도좌 정기방문 때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한 그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은퇴한 주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교황은 크게 웃으면서 “겸손하신 분”이라 화답했다.
이처럼 박 주교는 겸손하고 소탈하다. 늘 웃는 얼굴로 사제들과 신자들을 대한다. 직접 컴퓨터로 ‘기도 상본’을 만들어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주며 매일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때때로 그를 ‘무른 사람’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한 가지 목표를 세우면 결실을 볼 때까지 뚝심 있게 추진하는 ‘호시우행(虎視牛行, 눈은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행동은 소처럼 성실하게)’형 인물이라고 평한다.
박정일 주교는 1926년 12월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12월 월남을 했으니 24년을 북한에서 살았다. 그는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다녔다. 그때 학교 동기인 서울대교구 고(故) 백민관(테오도로) 신부를 만나 평양교구 영유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의 반대로 숭인상업학교 졸업 후 신학교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1945년부터 3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그런데 당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앓자 어머니가 “신부가 되지 못해 병이 났다”며 결국 신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그래서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1949년 5월 7일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됐다. 귀가 명령을 받고 평양교구청에 와보니 교구장이던 홍용호 주교도 체포돼 행방불명 상태였다.
“1949년 5월 7일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밤 사이 경찰들이 신학교 옆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이닥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님과 독일 신부님, 수사님, 교수 신부님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거예요. 창밖을 보니 경찰이 두세 명씩 짝지어서 신학교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웠죠. 5일간 숙소에 갇혀 지냈습니다. 5월 13일에 학교를 폐쇄하니 모두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짐을 챙기는데 묵주나 성상, 성경은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학교에 있던 성작이나 성광 같은 성물은 부제와 상급생들이 주방에 근무하는 분들을 통해 몰래 밖으로 옮겨 놨다고 하더라고요. 신학생들은 짐을 싸서 다음날 평양 주교관으로 갔지요.”(생전 인터뷰에서)
사제의 꿈을 버릴 수 없던 박 주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몰래 월남 계획을 짰다. 수소문 끝에 평양에서 월남을 돕는 교우를 소개받았다. 1950년 2월 말이었다.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갔지만, 정치보위부원에 발각돼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혔다. 심문과 폭행, 굶주림을 견딘 끝에 겨우 풀려났다. 그때가 5월 초였다.
6월에 전쟁이 났다. 그는 북한군에 강제 징집됐지만, 용케 도망쳤다. 한동안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평양 관후리성당으로 가서 캐롤 몬시뇰이 써준 ‘신자 확인서’를 갖고 미군 차량을 얻어 타고선 12월 초 대동강을 건너 월남했다. 12월 23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명동대성당 주님 성탄 밤미사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덕원신학교 신학생이던 황춘홍 신부를 만났다. 혜화동 신학교에 신학생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정의채 몬시뇰과 김진하 신부를 만났다. 박 주교는 6·25전쟁 동안 30여 명의 신학생과 함께 대구와 제주, 부산 영도로 피난하면서 오로지 사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임시 신학교에서 열심히 신학 공부를 했다.
“1951년 여름에 인천에서 만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셋만 월남했더라고요. 형들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들까지 이동하긴 어려웠던 거죠. 아버지께서 해주에서 밀선을 구해 인천으로 오셨습니다. 남쪽에 오자마자 저를 찾으셨는데 ‘이놈이 살아있다면 분명 신학교에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답동성당에 가서 우리 아들이 신학생인데 확인 좀 해달라고 하셨고, 부산 신학교에 있던 제게 연락이 닿은 겁니다. 그 길로 인천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었죠.”
박 주교는 1952년 봄 로마에 있는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우르바노대학교는 규율이 엄격했다. 모든 수업은 라틴말로 진행됐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수단을 입어야 했다. 방학 때에도 집에 가지 못하고 신학교 별장에서 기숙 생활을 해야 했다. 신문은 물론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다. 박 주교는 “로마에서 10년을 살면서 한국에 전화 한 번 할 수 없었고, 동생이 보내온 편지 1통을 받아보았을 뿐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우르바노대학교에선 철저한 복음 선포 의식을 배웠다. ‘한 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라는 표어를 늘 자랑스럽게 외치곤 했다. 성모 신심도 몸에 깊이 뱄다.
박 주교는 1958년 11월 23일 로마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성구는 ‘나 주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2)이다. 주교회의가 펴낸 「성경」에는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로 돼있다. 그는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사제로 뽑아주신 주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시편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훗날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었다면 부족한 제가 66년간 사제로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를 위해 기도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드리고 특히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박 주교는 사제품을 받고 나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우르바노대학교를 졸업 후 장학금을 받고 그레고리오대학교와 안젤리쿰(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에서 1년씩 사회학을 공부했다. 사회학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가 사제가 부족하니 빨리 귀국할 것을 요청해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1962년 귀국했다.
박 주교는 귀국할 때 같은 평양교구 출신 유재국·장덕범 신부와 함께 부산교구에 입적했다. 당시에는 사제품을 받고 바로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평양교구 출신 셋은 부산교구에서 처음으로 1년 넘게 보좌 신부 생활을 했다. 이후 1964년 문산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아 사목하고 있을 때 마산교구가 설정됐다. 문산본당이 마산교구로 편입되면서 마산교구 사제로 입적됐다. 이후 1970년부터 대건대신학교(현 광주가톨릭대) 교수로 윤리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박 주교는 1977년 4월 15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초대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5월 31일 제주 중앙성당에서 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에게 주교품을 받았다. 주교 수품 성구는 ‘충성과 온유’(집회 45,4)다. 박 주교는 제주교구장 착좌 후 “앞으로 제주교구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이 두터운 교회, 그리고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사목 이념을 밝혔다. 그가 약속한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는 제주교구의 전통이 됐다. 그는 5년간 제주교구장으로 사목하다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제6대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박 주교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과 1987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그 가운데 주교로서 그에게 가장 보람되었던 것은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피데이 도눔 선교사를 남미 페루에 파견한 일이었다.
“한국 교회가 성숙한 교회답게 새로운 출발을 할 때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교구 사제들에게 보편 교회에 이바지하는 선교활동에 동참하자고 호소했지요. 고맙게도 정승현·방의성·김윤섭 신부님이 피데이 도눔을 자원해줬습니다. 이들이 밀알이 돼 현재 서울·대구·수원·대전·원주·춘천 등 많은 교구 사제들이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지요.”
박 주교는 또 전주교구장 시절 천호성지와 치명자산성지를 조성한 게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 바 있다. 박 주교는 전주교구장으로 6년간 활동하다 1988년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03위 시성 이후 전주교구장으로 있을 때 초기 순교자 시복 청원을 준비했었다.
1999년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후 주교회의 산하에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주교들의 동의로 위원장이 됐고, 11년간 시복시성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마산교구장이었기에 교회법에 따라 마산교구장이 책임을 맡아 시복 대상자를 선발하고 시복예비심사 재판을 이끌었다. 그는 “하느님의 종 124위가 한 명도 탈락 없이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모두 복자품에 올라 매우 기쁘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박 주교는 또 ‘나자렛 예수 수녀회’를 설립했다. 마산교구에서 처음 설립한 수도회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나자렛 예수 수녀회는 홀몸노인과 매 맞는 여성, 갈 곳 없는 아이들과 함께 30년이 넘은 폐교를 수리해 함께 살고 있다.
박 주교는 2002년 마산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교회는 늘 선교해야 하고, 사회 속에 현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은 순교자 영성과 순교 정신을 기반으로 한 올바른 정신 자세와 자기 쇄신의 태도, 시대의 표징과 사람들의 필요를 재빨리 파악하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사제들에게 “내적으로 과감한 쇄신을 이뤄 겨레가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착한 목자가 돼달라”고 권고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