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부터 시작된 창조 시기를 맞아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호소하신다.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입시다.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지구가 ‘열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지구도 지금 ‘아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의 이와 같은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교황은, 끓는 지구(global boiling)를 염려하는 가운데, 우리가 지구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물으신다. 우리의 응답이 미진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가 지구가 끓어올라 더워진 데는 민감하면서도 지구가 앓고 있는 것에는 둔감한 이유가 기술지배 패러다임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교황은 예리하게 포착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고, 전 세계가 서로 만나는 ‘접촉 지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모든 창조물들과 하나로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기술지배 패러다임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고, 전 세계가 서로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서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6항)
2024년 여름 무더위가 참으로 길고 심했다. 나는 지은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 1층에서 살고 있는데, 조금 그늘이 진 침실은 32℃, 햇빛이 드는 거실은 33℃까지 올라갔다. 통풍을 시키며 자연 바람하고 함께 살면서, 바람이 불어 33℃에서 32℃, 32℃에서 31℃로 기온이 내려가는 것을 느낄 때면 바람이 참으로 고맙다. 집 밖으로 나오면 뜨겁기는 해도,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이것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바람 없는 여름 없고, 바람 없는 도시 없다.
그런데 에어컨으로 온도를 33℃에서 24℃, 혹은 23℃로 내려놓고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연 바람을 만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밖으로 나가서도 바람을 느끼기보다 뜨거운 열기에 얼른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하기 쉽다. 기술지배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에어컨과 같은 제품들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 일상에 깊게 들어와 있다. 기술지배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연에서 떼어놓는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자연 만물과 이웃을 만날 때 우리에게 ‘접촉 지대’가 되어 주는 자연을 잊게 만들어서 ‘접촉 지대’를 삭제하는, 그리하여 결국 그 사용자들이 자기와 자기 후손들을 스스로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8월 30일 새벽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가 다시 기차로 전남 나주로 가서 택시를 타고 남평에 있는 광주가톨릭대학교로 이동해 신학생들 수업을 동반했다. 그리고는 광주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송으로 가서 카리타스대학원 영성과 실천 강의를 위해 가톨릭꽃동네대학교로 갔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몸이 굳어오기 시작해 밤새 앓아야 했다. 오른편 어깨 쪽으로 마비가 와서 숨을 깊게 쉬기가 어려워졌고, 성호를 긋기 위해 손을 이마까지 올리기가 힘들었다.
아픈 과정을 통해서 “고통이 크면 클수록 움직일 가능성은 줄어들고, 평형에 대한 그리움은 커진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평형을 회복해 가는 동안,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병과 함께 살 줄 아는 통합 생태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아갔다. 선인들이 말한 것처럼, 앓는 것은 알아가는 과정이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이웃들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알아가는 은총의 비에 젖는 때다. 그런 속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물음이 있었다.
이 끓고 있는 지구 시대에 전주교구청은 에어컨 온도를 26~28℃로 설정하고 있었는데, 그 온도를 몇 ℃로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 적정 온도를 어떻게 합의해 갈 수 있을까? 우리 교회와 사회는?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