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연구소가 발행하는 월간지 「교회와 역사」에 실을 원고를 청탁해야 할 일이 생겼다. 주제에 맞는 사람을 고민하다 어릴 적 다니던 성당 보좌 신부님이 생각났다. 연락처를 알아내 신부님께 전화를 드리면서 뭐라고 인사를 할까 고민했다. 초등학교 때 뵙고 근 30년 연락을 못 했으니 내 이름을 말하면 아실까? 아니면 업무적으로 인사하고 나중에 신부님과의 인연을 밝힐까? 마음을 못 정한 순간 신부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나도 모르게 “신부님 저 ○○본당에 다니던 가밀라인데요. 기억하셔요?” 순간 신부님이 “아이고 내가 너를 어떻게 잊니? 이제야 연락을 하네” 하셨다.
난 전화를 건 목적도 잊은 채 코끝이 찡해졌다. 전화선 너머로 신부님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고 안부를 물으셨다. 그리고 당연히 원고를 써주겠다고 하셨다. 신부님은 전화를 끊기 전 “가밀라야, 나한테 짜장면 사주었던 일 기억하니?” 하고 물으셨다. “제가요?”
내가 다닌 성당은 집에서 뛰면 3분, 걸으면 5분 거리였다. 성당을 짓기 전 목욕탕 건물 2층을 세내어 성당으로 썼는데 “아래층에서는 몸을 씻고 위층에서는 영혼을 씻을 수 있으니 우리 신자들은 영육 간에 건강해서 좋겠습니다”라는 신부님의 강론에 신자들이 왁자하게 웃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새로 지은 성당은 놀이터였다. 언제나 성당에 가면 친구도 있었고, 주일학교 선생님과 기타를 치면서 성가를 부르곤 했다. 수녀님은 “수녀 돼라” 하시면서 수녀원으로 불러 맛있는 저녁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을 주셨다. 짜장면을 사드렸던 그 신부님은 교회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책장 가득 채워두고 방을 학생들에게 개방하셨고 책 보기 좋아했던 내게는 천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이 다른 본당으로 떠나셨다. 난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때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떠나기 전에 내가 짜장면을 사드렸다는 것이다. 아마 열한 살이나 열두 살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사제관을 찾아와 신부님께 나가자고 하더니 성당 옆 중국집으로 모시고 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드리고 다 비울 동안 앞자리에 턱 괴고 앉아서 “맛있으세요?”를 연신 물었는데 일부러 한 젓가락도 주지 않고 다 드셨다고 했다. 신부님은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일찍 은퇴해 짜장면 만드는 기술을 배워 공소나 지방 본당을 다니면서 신자들에게 ‘짜장면 봉사’를 하고 싶었지만 교구의 소임이 있어 일찍 은퇴도 못해 당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셨다.
어린 내가 어떻게 신부님께 짜장면 사드릴 생각을 했을까 싶다. 어린 마음에 신부님 가시는 게 속상했을까, 아니면 책을 못 보게 되는 것이 슬펐을까.
혜화동성당에서 결혼하신 부모님은 혼배성사 때 받은 세 가지 질문 중에 “하느님께서 주실 자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기르겠다”는 서약을 잘 지키셨다. 두 분의 딸인 난 교회의 울타리에서 잘 자라 어른이 되었고 지금 교회 안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하느님 뜻 안에, 교회 안에 남아 있도록 나의 영혼을 잘 보살펴주신 부모님과 ‘또 다른 그리스도이자 사제이신’ 영혼의 아버지, 신부님들 한 분 한 분을 기억한다. 고맙습니다.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