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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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칼럼] 이주민과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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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대 세계는 폭증하는 이주민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 이주민의 수는 2억3200만 명에 이른다. 시리아 출신 망명 신청자가 제일 많고 시리아 난민들은 대부분 해외로 떠나고 있다. 또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 수단 출신 난민이 많은 상황이다.

 

우리는 현재 역사적 갈림길에서 살고 있다. 자본과 재정의 이전을 허용하는 현재의 경제 체제 안에서 언제까지 사람의 이동을 막을 수 있을까? 또 언제까지 자원을 고갈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떠나게 하고 지구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금의 산업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남반구에서 권위주의 정부와 무장투쟁을 지원하며 서구의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쟁과 자연재해를 피해 결사적으로 매일 국경을 넘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눈을 감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언제쯤 시민권과 사회 정책, 국가의 범위에 대해 다시 고려하게 될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강제로 자신의 집을 떠나야 하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응답해야 한다. 이주민과 관련해 사회정치적·문화적·심리학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신학적·사목적 관점에서 본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이주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안내서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시작부터 인간의 이동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이 이주에서부터 이집트에서의 탈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 유배, 성가정의 이집트로의 탈출, 그리고 초기교회의 전교활동까지.

 

 

사도 바오로가 “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히브 13,14)라고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쓴 대로, 우리는 모두 이주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의 침묵과 이주민을 동시대 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분위기는 지적돼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주와 추방의 역사와 관련돼 있고, 마찬가지로 순례와 환대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스며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주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정체성과 존엄, 정의, 환대, 4가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대부분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족 국가’라는 개념을 편안하게 느낀다. 전통적인 ‘가족’과 ‘집’의 개념이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다르게 생각한다. 마태오복음서 10장 34절에서 그리스도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면서 전통적인 가정관에 분열을 일으켰고, 마태오복음서 12월 48절에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면서 종래의 가족 관계에 도전장을 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혈연이나 특정 지역의 연관성이 아니라 집을 떠나 그리스도를 따라 순례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주민과 난민을 이해하는 열쇠는 대화이다.

 

 

존엄과 관련해서,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됐다고 밝힌다.(창세 1,26; 5,1-3 참조) 인권에 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이를 넘어설 수 없다. 우리가 이주민이라고 부르든 난민이라고 부르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이들에게 노동시장의 필요에 따라 경제적 혹은 상업적 딱지를 붙인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됐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특별한 존엄과 형제애를 부여한다.

 

 

마태오복음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어릴 때(마태 2,13 참조)와 성인(마태 8,20 참조)이 돼서도 난민의 모습도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와의 깊은 유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강조한다. 집 없는 이주민인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가 이주민에게 가까이 갈 때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통해 거부당한 이들과 한 식탁에 앉아 우정을 맺는다. 이주민과 난민이 바로 이 거부당한 이들이다. 환대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활동이며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

 

 

이 4가지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이주 현상의 실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보다 이주민에 관해 세계의 양심을 호소하는 이는 없다. 지난 2016년 4월 그리스 레스보스섬을 방문해 이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며 한 교황의 기도문으로 글을 마친다.

 

 

“우리 모두의 부모이신 자비로우신 주님, 모든 남녀와 어린이를 위해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희생됐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아시고, 사랑하시며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이들을 잊지 않게 해 주시고,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이들의 희생을 영광스럽게 하도록 이끄소서.”


 

 

글 _ 미론 페레이라 신부(예수회)
예수회 사제로 평생을 기자 양성 등 언론활동에 힘써 왔다. 인도 하비에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라 크루아(La Croix)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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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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