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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신부의 모자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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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피랍되어 순교한 유영근 신부의 「소팔가자를 방문하고」란 기행문을 읽었다. 1944년 2월부터 5월까지 「경향잡지」에 실렸다. 중국 지린성 소팔가자는 김대건과 최양업 두 분 신부님이 늦어지는 귀국을 기다리며 페레올 주교님께 삭발례를 비롯 부제품까지 받았던 뜻깊은 장소다.


유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이 이곳을 떠난 지 100주년 되던 해를 맞아 1월 중순 만주의 혹독한 추위 속에 우마차를 타고 어렵게 이곳에 도착했다. 「수선탁덕 김대건전」과 「최도마 신부 전기」를 집필한 유영근 신부가 두 분의 체취를 찾아 오매불망 그리던 곳이었다.


그곳 정(丁) 안드레아 신부 가정에서 유 신부는 김대건 신부가 조선으로 떠날 때 남겨두고 간 만주 사람의 두루마기와 모자 이야기를 들었다. 김 신부의 치명 이후 그곳에서는 이 두 가지 물건을 천하에 없는 보물로 여겨왔다. 위중한 병자의 몸에 두루마기를 덮어주면 그 병이 말끔히 나았다. 모자는 병자에게 씌우기만 해도 쾌유되었다. 그 뒤 두루마기는 도둑맞고, 모자는 어느 신부의 강청으로 빼앗겨 당시에는 모자에 달렸던 술 절반만 남아 있던 상태였다.


유영근 신부는 중간에 들른 소도시에서 청해온 사진사에게 부탁해 그곳 홀랑(呼蘭) 수녀원 분원장 정 테클라 수녀님이 보관 중이던 그 모자술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함께 소개했다. 유 신부는 수녀님께 간청하여 남은 모자술에서 대여섯 가닥을 어렵게 얻어왔다.


귀국 길에 유 신부는 당시 신의주본당 주임으로 있던 동기생 오기선 신부에게 들러 모자 술 두 개를 나눠주었다. 유 신부가 가졌던 것은 사변 통에 사라지고 오기선 신부에게 나눠준 그 비단 모자술의 두 가닥이 현재 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존되어 전한다. 만주에 남았던 것도 이제 와 찾을 수 없게 되어, 성 김대건 신부님이 소팔가자를 떠나 올 때 남겨둔 유품은 이것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지 싶다. 유 신부의 기행문 기록과 오기선 신부가 「사제생활 반생기」에 남긴 술회를 통해 비로소 앞뒤로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오늘날 이 모자술의 사연은 까맣게 잊힌 채 박물관의 한 유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또 유 신부는 기행문에서 「소팔가자소사」(小八家子小史)란 책자를 인용했다. 복잡한 경로로 추적해 보니 이 책자는 당시 만주교구에서 펴낸 「만주공교월간」(滿洲公敎月刊)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었다. 잘못된 정보이기는 하나 1843년 당시 페레올 고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이 머물 때 이야기며, 혼자 남은 최양업 신부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세 사람의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다가 8~9년 만인 1852년에야 입국하여 바로 이듬해 세상을 뜬 일이 적혀 있었다.


이런 글들을 바탕으로 유 신부는 「최도마 신부의 전기」에서 김대건 신부를 조선에 보내놓고, 순교 소식을 들었던 최양업 신부의 낙담과 절망, 그리고 조선사목구의 진출을 준비 중이던 페레올 주교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안타까운 입국 시도 등을 자세히 담아낼 수 있었다.


기록이 기록을 부르고, 정보가 정보를 낳는다. 끈 하나를 당기면 거기에 엮인 사연들이 줄달아 달려 나온다. 편린에 불과했던 조각 정보가 어느새 큰 서사가 되어 우리 앞에 드러난다. 우리가 매 순간 사소한 기록들에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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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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