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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동국교우상교황서」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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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4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연구차 대만 중앙연구원에 머물렀다. 「신미년백서」로 더 알려진 「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란 필사본의 원본을 확인하고, 주변 자료를 더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중앙연구원 부사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간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누구도 실물은 보지 못한 듯했다. 이곳 도서관에서도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라는 것을 어려운 절차를 거쳐 굳이 원본을 꺼내서 여러 날 살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1801년 황사영 체포와 함께 백서가 압수되면서 신유박해 당시의 가장 생생한 증언은 통째 의금부 창고로 들어갔다.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교회에 알려 도움을 청하려는 절박한 심경으로 10년 뒤인 1811년에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님께 올린 탄원서가 한문 원문으로 이 책 속에 들어 있다.


당시 글의 작성자는 황사영 백서를 보지 못해, 이 탄원서 속 조선 교회에 대한 기술은 그 이후에 전해 들은 것을 수습한 것이었다. 사제 파견 요청과 함께 신유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사적을 자세히 적고, 당시 조선 교회의 처지를 탄원하였다. 교황님께도 따로 편지를 써서 그 글을 교황청으로 보내줄 것을 북경 주교에게 요청했다.


책 뒤쪽에 북경 주교의 답장과 조선 교회의 재답장이 실려 있다. 이중 교황님께 보낸 자료는 윤민구 신부에 의해 한문 원본이 로마에서 확인되었고, 북경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포르투갈, 이태리어 번역본만 찾아냈다. 한문으로 된 원래 글은 오직 이 책에만 남아있다. 뒤쪽의 두 통 편지도 여기에만 실린 것이다.


대만의 교회사 연구의 대가인 고위녕 교수를 만나 여쭈니, 원래 상해 서가회 도서관에 있던 것이 중국 공산화 당시 예수회 자료가 필리핀 마닐라로 소개될 때 그리로 갔다가, 1960년대 초에 한문 자료만 대만에서 개교한 예수회 소속 보인대학으로 다시 보내져서 대만에 남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린 대만의 황덕관(黃德寬) 신부는 1985년 보인대 신학논집에 발표한 「한국교우와 한국천주교」라는 논문에서 1985년 당시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시복식 미사의 감동적 장면을 묘사하면서 한국 교회사와 이 책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원본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연필로 공책에 메모를 거듭하였다. 여주 지역 순교자들의 이름이 유독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지역 신자가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유사정(兪斯定)의 이름으로 보낸 네 번째 편지를 보고는 유스티노라는 본명을 썼던 조동섬의 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국 전 대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학연구중심의 주최로 이 자료를 가지고 발표를 했다. 대부분 이 책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터라 도서관장과 관련 학자들이 참석해서 큰 관심을 표시했다. 처음 이 자료를 세상에 알렸던 황덕관 신부가 중국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가 200년 만에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발전을 이룬 것을 보며 우리는 왜 저들처럼 못하나 하며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던 논문 속의 목소리가 오래 생각 속에 맴돌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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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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