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교육청의 한 교육문화회관으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교육 담당자가 제가 쓴 자녀교육서를 보고 연락을 준 겁니다. 교육날 아침 회관 입구에 들어서는데 저도 모르게 발길이 딱 멈춰지는 겁니다. 로비 입구에 ‘교육청’이란 그 세 글자 때문에. 아니 더 정확하게는 제 안에 있던 열등감과 수치심이 딱, 건드려진 것이지요.
그 순간 ‘아이의 자퇴, 학교 밖 청소년, 그리고 이제 나는 학교 밖 청소년의 부모!’ ‘이런 내가 교육청 소속 강단에 서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던 겁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나, 아이가 남들 다 다니는 학교를 못 다닌다는 게 당시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아이가 그렇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눈 감았을 뿐 적어도 저에게 자퇴는 허락도 수용도 아니었습니다. 부모교육을 하고 돌아다니면서도 집으로 돌아와 사회적 가면을 벗고 나면 누구보다 꽉 막힌 엄마였지요. 누구보다 완고한 틀, 보수적인 사고에 갇혀 저는 저대로 아이는 또 아이대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아니 고통에 몸부림을 쳤는지 모릅니다.
사고의 틀이 견고할수록 깨어지는 아픔이 클 수밖에요. 사회적 가면을 쓰고 나갔을 때 속으로 느끼는 수치심, 가면을 벗어던지고 민낯의 상태로 아이와 마주한 후 씨름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엔 형편없는 나의 양육 효능감 앞에 또 자괴감이 올라왔지요. 그런 상태니 ‘내 주제에 교육은 무슨 교육, 감히 누구 앞에서 강연을 해!’ 하는 내면의 소리가 마치 전투 부대처럼 일어나 나를 공격해 왔습니다. ‘나는 자식 교육의 실패자다. 고로 나는 감히 남들 앞에 설 수가 없다’며 나라는 본질을 ‘패배자, 실패자’로 치부해 버렸지요. 나란 사람의 본질을 그렇게 왜곡하는 심리적 융합 상태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질 못했습니다.
그날 교육은 어찌어찌 해내고 왔지만, 그 후 저는 제일 먼저 지인들과의 연락을 끊고 하던 일도 멈추고 혼자 동굴을 파고 들어갔지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죽도록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 현실에 적응도 되고 받아들이고 나니 이제는 ‘자퇴’가 뭐라고, 그게 사람이 죽고 살 일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아이가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을 어찌 할 줄을 몰라 허투로 시간을 보내면, 그 모습이 제겐 ‘네가 시간이 넘쳐나다 못해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싶고, 겨우 다스렸던 속은 또다시 회까닥, 손바닥 뒤집히듯 감정이 요동을 칩니다. 남들이 ‘다 지나간다, 요즘 애들 다 그렇다.’고 아무리 말해 줘도 막상 24시간을 붙어 있으며 지켜보는 마음은 시시각각 도전받고,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지요.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어떻게 안 되는 게 자식앓이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친구를 만나 실컷 놀다 들어왔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엄마, 나 오늘 친구랑 사주풀이 상담했어요. 어제는 타로점도 보고.”
남들 학교 가는 시간에 갈 데가 없는 아이, 불러낼 친구가 없는 아이는 말로는 자유롭고 좋다면서도 내심 자신의 미래가 궁금은 했나 봅니다. 검정고시는 합격할 수 있는지, 지금 만나는 친구들은 어떤지, 예전에 만나던 친구들이 연락 오는데 계속 만나도 좋을지, 대학은 갈 수 있는지, 뭘 하면서 살면 좋을지 등 궁금한 게 많아서 많이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제가 몰랐던 아이의 속내는 생각보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아이의 속내는 걱정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인생의 시간표라는 게 있고, 저마다의 그 시간표가 다르듯이 지금 우리 아이는 자기 탐색의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요. 어쩌면 아이가 나중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학교 그만두고 그 때가 속으로는 가장 치열했던 시간’이라고요.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또 다시 맹세해 봅니다.
‘예! 주님, 아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뭐가 될 줄 알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라자로의 병에 대해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라고 하셨지요? 우리 아이 또한 그리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얄팍한 신앙고백 끝에 또 나약한 생각이 올라오는 겁니다.
‘주님, 너무 큰 영광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금 저 아이가 당장 일어나 자기 할 일이라도 좀 하기를!’
오늘도 엄마라 이렇게 흔들리며 중심을 잡아 봅니다. 이 흔들림 또한 균형을 위한 몸부림이겠지요. 오늘도 그 균형 속에서 당신의 자녀와 안녕하기를 빌어봅니다.
글 _ 최진희 (안나)
국문학을 전공하고 방송 구성작가로 10여 년을 일했다. 어느 날 엄마가 되었고 아이와 함께 가는 길을 찾아 나서다 책놀이 선생님, 독서지도 선생님이 되었다. 동화구연을 배웠고, 2011년 색동회 대한민국 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서 대상(여성가족부장관상)을 수상했다. 휴(休)그림책센터 대표이며, 「하루 10분 그림책 질문의 기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