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종합] 잉글랜드와 웨일스 주교단은 말기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는 ‘조력자살’(assisted dying)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영국 하원에서 통과된 것에 대해 11월 30일 깊은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 법안은 6개월 미만의 생존 기간이 예상되는 말기 환자가 의료적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원은 11월 29일 실시된 조력자살 법안에 대한 2차 독회 표결에서 찬성 330표, 반대 275표로 법안을 가결했다. 1차 독회에서는 표결하지 않은 만큼 2차 독회가 첫 표결이었다. 법안은 이후 하원 위원회와 3차 독회 등 추가 절차를 거쳐 상원으로 넘어가는데, 수정의 여지가 남아있다.
의회 표결 후 생명 문제 담당 존 셰링턴 주교는 표결 결과에 대해 우려를 표시, “이 법안은 원칙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고, 특히 크게 우려되는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셰링턴 주교는 조력자살에 대한 양심적 반대 권리 보호 부족이 특히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법안에 포함된 조항들이 의사들이 조력자살에 대해 양심에 바탕을 두고 반대할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하며, 조력자살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는 호스피스와 요양원들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의사가 환자에게 조력자살에 대해 ‘먼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셰링턴 주교는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완화 의료(palliative care)의 질과 이용 가능성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가톨릭 공동체가 이 법안이 의회 진행 과정의 다음 단계에서 기각되도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 표결은 4시간이 넘는 격렬한 토론 끝에 이뤄졌다. 특히 표결은 당론에 구애받지 않고 의원 각자의 양심에 따라 찬성과 반대를 결정하는 ‘자유 투표’로 진행됐다.
법안 반대자들은 특히 노인, 장애인, 취약계층의 말기 환자들이 남은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특히 표결 전 법안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부족했고, 조력자살을 허용한 다른 국가들의 경우 안전장치가 약화된 사례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반면 법안 찬성자들은 이 법안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말기 환자들에게 스스로 고통을 줄이고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표결에 앞서, 가톨릭교회 주교단과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법안의 윤리적·실무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려를 제기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주교회의 의장 빈센트 니콜스(Vincent Nichols) 추기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 “‘죽을 권리’는 쉽게 ‘죽어야 할 의무’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전 세계 대부분 국가가 조력자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조력자살을 합법화한 국가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스위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스페인, 미국 일부 주 등이다. 특히 조력자살을 원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처음으로 이를 합법화한 스위스를 찾아가 죽음을 맞고 있다. 영국에서는 2015년에도 같은 법안이 발의됐다가 부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