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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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신부의 철학 일기] ‘대단한’ 이들의 한없는 가벼움

박성호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프란치스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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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 워싱턴에서 신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수도원에 함께 살던 해리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해 사제품을 받고 신학 박사학위 과정을 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로 온 것이었죠. 등산을 좋아하는 건장한 체구의 잘 생긴 뉴욕 출신 프란치스칸이었는데,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인 팔방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내성적이어서 저 같은 외국인 신학생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한 형제는 아니었고, 제게는 누군가 수도원 공동 화장실에 두루마리 휴지를 반대로 끼워 넣었다고 짜증을 내던 모습으로 기억되는, 그냥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을 같이 살았을까요. 그가 대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 며칠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만, 병원에 갔다 오더니 그렇게 전했습니다. 다들 놀랐습니다. 본인이 가장 놀랐겠죠. 이전까지는 한 번도 크게 아파 본 적이 없었다고 그러더군요. 그 와중에 농담을 하는데, 저희보고 건강에 신경 쓰지 말라고, 자기는 건강에 좋은 것 세심하게 다 챙기면서 살았는 데도 암에 걸렸다고요.

그렇게 시작된 투병 생활, 소란스럽지 않은 그의 마지막 발걸음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대장암 수술 후 배 쪽에 배변 상자를 달고 있어서 윗도리가 항상 불룩 튀어나와 있었고 조금 뒤로 누운 자세로 앉곤 했죠.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공동체 기도와 미사에는 대부분 참여했습니다. 학교는 곧 그만 두었지만, 그 외에는 다른 형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냈습니다.

당시 제 영어 실력으로는 설명을 들어도 그의 병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몸은 야위어가면서도 그의 표정은 점점 더 평온해져 갔고, 가끔 미사를 집전할 때면 아주 단순하게 부활에 대해 강론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1년여를 살다가 어느 날 밤 자신의 수도원 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주 대림 시기의 평범한 화요일 저녁, 삼류 영화에서나 볼 것 같았던 요란한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음을 보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던 중 이렇게 뜬금없이 해리 형제의 소박한 마지막 시간을 떠올렸습니다. 물러나야 할 최고 지도자의 노욕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요? 국민을 대표한다는 ‘대단한’ 이들의 한없는 가벼움 때문이었을까요?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 우리의 갈망과 기다림이 향하는 곳이 저렇게 가볍고 허망할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을까요?

일주일 후에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에게 당장 내일이라도 어느 방향으로 뒤집힐지 모를 세상사를 언급하는 것이 어리석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쪽으로 뒤집힌들 저쪽으로 뒤집힌들 참으로 가볍고 가볍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정치 사건들이 해리 형제의 소박한 일상의 한 귀퉁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볍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발이 욕구의 만족이라는 그 허망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가 아니라 허무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여의도에서, 광주에서, 부산에서, 거리에서, TV 모니터 앞에서, 전국 구석구석에서 우리는 모두 마음을 모아 나름의 한 걸음씩을 떼고 있습니다. 우리 발걸음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가장 단순한 원칙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하고, 일시적인 욕구의 충족이 아닌, 참 선이신 그분을 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만이 그 의미와 무게를 가질 것이며, 그 외의 요란한 가짜 권력들은 모두 가려내어질 것입니다. 구세주의 성탄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주어진 삶에 충실했던 한 수도자의 소박한 마지막 발걸음에 담겨 있던 삶의 의미와 방향을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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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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