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사도 바오로는 서기 50~52년경에 행한 2차 선교여행 때 지금의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주변 지역인 갈라티아 지방에 들렀습니다. 그는 그곳을 그냥 통과하려고 한 듯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중병을 앓아서 여행을 중단하고 요양하는 기회에 갈라티아 지방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갈라 4,13-15; 사도 16,6)
Q. 갈라티아서는 언제 어디서 기록되었습니까?
A. 갈라티아서의 기록연대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선교여행 때 에페소에 도착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서기 54~55년경으로 생각되며 기록 장소는 에페소일 것입니다.
Q.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인들에게 편지를 쓴 동기는 무엇입니까?
A.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와 토의를 거쳐서 이미 결정된 원칙에 따라서 갈라티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곧 이방인 개종자들이 유다 율법을 수용하지 않고도 신자가 될 수 있음을 설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이 하느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는 필요한 조건이라고 갈라티아인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적대자들이 갈라티아인들이 온전한 구원을 얻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외에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갈라 6,12-13)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교우들이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설득 당해서 율법을 지키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몹시 마음 상해하면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Q. 사도 바오로는 적대자들에게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A. 갈라티아 교회 공동체의 적대자들은 율법을 강조하는 유다주의자들과 도덕적 방종주의로 빠지는 영적인 열광주의자들 혹은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이들 중 유다주의자들은 할례를 끌어들이려고 하면서 갈라티아 교우들을 율법에 종속시키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영적 열광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끝장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함이나 도덕적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오로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갈라 5,13)라고 권하면서 “육체적인 일”을 단죄하고 있습니다(갈라 5,19 -21).
Q. 갈라티아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A. ① 1,1-10 : 인사와 질책
② 2,11-2,21 : 바오로의 사도직과 복음의 출처
③ 3,1-5,12 : 편지의 핵심부분 - 신앙과 율법
④ 5,13-6,10 : 훈화부분 - 육정에서 해방시키는 성령의 열매
⑤ 6,11-18 : 전체 요약과 인사
Q. 갈라티아서가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A. 갈라티아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다교 율법과 절충시켜 교우들을 당황케 한 사도 바오로의 적대자들을 거슬러 복음의 진리를 옹호한 편지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하느님이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 편에서 할 일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을 신앙으로 법, 하느님의 뜻, 사랑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며 육체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성령의 인도 하에 그리스도의 법, 하느님의 뜻, 사랑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글 _ 박정배 신부 (베네딕토, 수원교구 용인본당 주임)
1992년 사제서품. 수원교구 성소부장과 수원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수리산성지 전담 신부 등을 역임했으며 양지본당, 광북본당, 샌프란시스코 한인본당, 신둔본당, 철산본당 등의 주임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