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요나 4,2)
가족들과 사소한 일로 다툼이 있을 때, 친구와 언쟁하고 불쾌한 마음이 떠나지 않을 때, 이웃과 작은 일로 목소리를 높이고 분을 삭이지 못할 때, 직장에서 분노가 극에 달하여 다 때려치우고 싶은 억한 감정이 치밀어 올 때, 그리하여 소화가 되지 않고 삶이 기쁘지 못해 그저 답답한 마음만 가득할 때, 바로 그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기도해 보았는가?’ 혹은, ‘나는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이었구나!’ 신앙을 가진 내가 평화롭고 기쁜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루를 기쁘게 시작한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십자가 아래에서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안의 모든 일과 사물들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겸손히 꺼내놓고 깊은 성찰 가운데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은 진정 평화와 기쁨의 환희로 가득 찰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의 잔잔하고 고요한 평화가 깨어질 때, 우리는 분명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 기도하고 있었는가?’ ‘믿음을 가진 나는 진정 영적인 삶을 추구해 왔는가?’ 이런 질문에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1-3)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화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였는데도 평화가 오지 않았다면, 내 기도 안에는 아직도 욕심과 욕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나에게는 아직도 잘못이 없고 모든 탓은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는 억울함과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어떤 기도가 온전히 하늘에 오를 수 있을까요? 그러니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불평이 자주 쌓일 때, 또다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과연 나의 기도가 그토록 간절했고 많은 인내를 가진 용서와 항구함의 기도였는가 반성하고 또 고개 숙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억울함에서, 혹은 잠시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기껏 며칠, 혹은 몇 달 기도하고는 ‘해도 해도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진정 나를 비우고, 때론 사랑 때문에 내 자신을 죽이는 겟세마니의 예수님 기도를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주 주님의 참뜻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았으니 답을 들을 수 없었고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수님께서 이토록 눈물을 흘리시면서 내게 바라시는 참 평화가 무엇인지 나를 비우고 진실한 기도 안에서 묻고 또 묻는다면 평화를 이루는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때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전혀 다를 것입니다.(요한 14,27 참조)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양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분께 맡겼을 때 훨씬 더 안전하고 평화스럽고 마음에 안정과 위로가 찾아오는데 우리는 그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룰 수 없는 것들까지 교만과 아집으로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이루려다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겟세마니의 예수님 기도가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내 자신의 이기적인 기도가 아닌, 내 뜻이 반드시 관철되어야 하는 고집의 기도가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예수님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분명 평화의 해결과 그것이 주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을,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의 번민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과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나가 또다시 말을 건네옵니다.
“저는 늘 이기적이었고, 제 중심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옳았다고 우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주 평화를 내팽개치고 멀리하였으며, 기쁨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죄 많은 저를 자비와 사랑의 주님께서는 가없는 사랑과 인내로 참아 주시고 때론 다독이셔서 저를 이곳 평화로 이끄신 분이십니다. 그분 사랑을 믿으셔야 합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