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심란한 마음이 들 때면 음식을 만들었다.
재료를 씻고 다듬어 프라이팬에 굽거나 튀기고, 갖은양념이 들어간 찜이나 탕을 냄비에 끓여 낼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가 심란한 날은 아이들이 포식하는 날이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요즘, 우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이불에 파묻혀 누워있고 싶지만, 시장을 잔뜩 봐서 집으로 왔다. 오늘의 요리는 5000원짜리 전복이 들어간 알탕과 곱창볶음이다.
음식 만들기 좋아하는 나의 재능은 엄마와 외할머니를 닮았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집에서 식빵과 과자를 오븐에 굽고 감자를 으깨 속을 채운 크로켓도 만들어 줬는데 ‘왕준련 요리교실’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못하는 음식이 거의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추어탕을 참 맛깔나게 끓였다. 미꾸라지를 한 소쿠리 사와 노란색 낡은 양푼이에 쏟아놓으면 어린 나는 괜히 신이 났다.
미꾸라지를 해감하려고 굵은소금을 양푼이 속에다 촤르르 촤르르 뿌려 넣으면 온몸으로 용트림하는 그 몸짓이 재미나 “할머니 소금 더, 소금 더” 이러며 조르기도 했다. 조선호박을 큼지막하게 숭덩숭덩 썰고 산초가루를 듬뿍 넣어 끓인 추어탕을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잘 먹기만 해도 “어린애가 뭘 좀 먹을 줄 안다”며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밥이 보약이다.”
추어탕 한 그릇도 보약이고 청국장도 보약이라고. 그 보약을 받아먹고 살아서인지 스무 살에 서울에 올라와 난생처음으로 감기라는 걸 걸려봤다. 할머니와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먹인 밥 덕분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들을 못 낳아 밖에서 아들을 본 할아버지와 산 할머니도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맏며느리로 살아온 엄마도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려 그 많은 음식을 만들어 먹였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아이가 전역하고 돌아온 날 오랜만에 밥상을 차려주었다. 고소한 버터를 녹여 칼집을 넣은 도톰한 전복을 노릇노릇 구워 감자와 버섯을 곁들였는데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사실 나는, 식탐이 많은 여자였다. 어려서부터 복스럽게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는다고 별명도 ‘똥뙈지’였다. 그런 나에게 무한 경쟁자, 음식을 양보해야만 하는 걸림돌이 나타난 건 아이를 낳고부터였다.
식탐 많은 내가 누군가에게 빵이나 고기를 양보해야만 하는 일이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시어머니는 가끔 손질된 갈치를 비닐에 곱게 싸서 구워 먹기 좋게 가져다주셨는데 머리랑 꼬리 부분을 빼면 두툼한 가운데 토막이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 유독 갈치구이를 좋아하던 나는 노릇노릇 구워진 갈치를 아이들 입에다 몽땅 발라 넣어줘야 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 그래서 갈치의 앞면은 아이들에게 먹이고 뒷면은 내가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제비새끼처럼 입을 쫙쫙 벌리며 맛있게 받아먹고 있는 애들을 보고 있으려니, 나 먹자고 두툼한 살코기를 빼돌린다는 게 어미로서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먹는 거 앞에서 사람은 치사해지는 법. 나는 독한 마음을 먹고 애들에게 말했다.
“김치도 먹고 된장찌개도 먹고 뭐든 골고루 먹어야 튼튼해지는 거야. 그래그래. 생선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하지만 눈치 없는 첫째는, “엄마, 꼬기 주세요 꼬기!” 이러며 통통한 명란 알 같은 손가락으로 갈치를 가리키곤 했다. 나는 너무 슬프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갈치 뒷면을 발라 아이의 밥숟갈에 얹어주었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