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성탄시기를 보낼 때엔 어김없이 떠오르는 하나의 추억이 있다.
사제서품을 받고 부임한 첫 소임지는 신자가 그리 많지 않은 조그만 성당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큰 도시로 변해있지만, 그때만 해도 본당 관할 공소가 있었고 어려운 살림에 근근이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 곳이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을 위해 가정방문과 함께 판공성사와 봉성체를 드리던 어느 날이었다. 2명의 봉사자와 함께 방문했던 한 할머니의 거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곳은 땅을 사선으로 파고 들어가 그 안에 비닐로 벽을 두른 반지하 토굴이다. 비닐 천막을 걷고 거의 기듯이 들어가 보니 2~3평 남짓한 공간에서 할머니가 기쁜 모습으로 사제를 반겨주셨다.
이 공간이 얼마나 답답하고 견디기 어려운 곳인지를 아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10분도 앉아있기 어려워 봉사자 2명은 나를 남겨놓고 밖으로 피신해 버렸다. 방안에 고여있는 역한 냄새로 인해 더 이상 앉아있기가 어려웠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평생을 사시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고작 30분 정도의 대화가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나는 다른 가정에 비해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대화를 나눈 후 고해성사와 강복을 드리고 인사를 고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무섭게 몸을 날리시면서 문 앞을 큰 대자로 가로막으셨다. 신부님이 오신다고 준비한 유자차가 있는데 그걸 대접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양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마음속에 기필코 신부님에게 유자차를 대접하겠노라는 굳은 결심을 하신 터였다. 할머니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본 후 나는 할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옷장 위에 놓아둔 유자청 단지를 꺼내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한 스푼 유자청을 퍼 올리셨다.
그 순간 나는 기겁을 하였다. 유자청 위에 뽀얗게 앉은 곰팡이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자청을 몇 스푼 꺼내 담은 그릇은 바로 양은 세숫대야였다. 어릴 때 보고 거의 보지 못했던 양은 세숫대야를 거기서 마주한 것이다. 할머니는 세안용으로 사용했던 세숫대야에 유자청을 물과 함께 끓인 후 컵에 따라 나에게 권하셨다.
나는 순간 곰팡이 꼈던 유자청 차를 마셔도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과학적 근거를 찾아 머릿속을 뒤적였다. 하지만 곰팡이 낀 유자청에 대한 질문은 곧바로 할머니의 정성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버렸다. 즉 사제에게 대접하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유자차를 기꺼이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곰팡이 폈던 유자청이라 하더라도 끓인 것이니 괜찮을 거야!”라는 의미에서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정성을 매정하게 거부한다는 것이 차라리 먹고 탈나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주임신부님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다. 사제가 한 사람의 청을 과감히 거절하지 못하면 그 결과가 다른 신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 나는 설사로 인해 오후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처신으로 다른 신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그 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른 신자분들에게는 실망과 아쉬움을 남긴 하루였지만, 적어도 그 할머니에게는 사제에게 평생 가장 큰 대접을 해드리는 기쁨의 하루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은 기능과 효율을 강조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최소비용의 최대수익을 강조하고, 같은 조건에서 최상의 판단을 추구한다.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도 타인을 위해 마음을 쓴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인 어리석음일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타인을 위한 희생과 사랑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치유의 원천이다.
우리 주변엔 ‘사랑의 바보’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로 인해 우리의 사회는 아직도 따뜻하고 살만한 것이리라.
글 _ 박현민 신부 (베드로,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사목 상담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상담심리학회, 한국상담전문가연합회에서 각각 상담 심리 전문가(상담 심리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는 전인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 성필립보생태마을에서 상담자의 복음화, 상담의 복음화, 상담을 통한 복음화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 「상담의 지혜」, 역서로 「부부를 위한 심리 치료 계획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