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요나 4,3)
본당에서는 한 달에 한 번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나 병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환자분들을 위해 봉성체를 합니다. 그런데 봉성체 하시는 어르신들 가운데는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어, 오늘 요나와 같은 탄식을 입버릇처럼 되풀이 하시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하느님은 왜, 빨리 나를 데려가시지 않나 모르겠어요. 어서 내 영혼을 거두시지 않고….”
어떤 분들은 살아오신 세월이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삶이었다는 듯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 온화함이 가득한 반면, 어떤 분들은 이기심과 욕심이 엉켜져 얼굴 역시 뻔뻔함이 엿보이는데, 자기만의 하느님을 찾고, 죽음 뒤에는 영원한 안식까지 얻고자 욕망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 몰래 제 속으로 이렇듯 웅얼거립니다. “무얼 그렇게 잘 사셨다고 하느님께서 곱게도 빨리 잘 데려가신대요?”
그리고 저 역시 그리 잘 살지 못한 죄가 발견되어 실웃음을 짓다가 가슴이 움찔거리기도 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도 욕심과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 잘 살아온 삶이 아닌데도 자신의 영혼을 빨리 곱게 거두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우리도 자주 이런 무례하고 겁 없는 망상의 기도를 올리곤 합니다. 요나의 이런 분노에 대하여 독일 도미니코회 루돌프 슈테르텐브링크 신부는 이렇듯 잘 표현하였습니다.
“요나에게는 편협한 자아가 문제였다. 아집에 빠진 작고 좁은 마음이 문제였다. 그래서 요나를 보면, 아집에 빠진 사람의 특징들이 제법 분명히 드러난다. 아집에 빠진 사람은 증오와 복수심에 가득 차 있다. 악을 악으로 갚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도는 악을 선으로 이겨내는 데 있다. 이는 요나의 생각과 절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사십 일 후, 니네베는 무너진다’는 요나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이타적 사랑은 요나의 이기적 사랑에 대립된다.”(루돌프 슈테르텐브링크, 「물
고기 뱃속의 지혜」, 분도 출판사, 119~120쪽)
조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원수의 나라, 아시리아 대제국의 수도 니네베의 처참한 멸망을 기대했던 요나의 복수가 어긋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강력한 힘이 니네베를 불바다로 만들어 죽음의 비참한 통곡 소리를 듣기 바랐던 요나의 잔인한 꿈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가 분노한 것입니다. 그리고 빨리 죽여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수천 번 들어 귀에 못이 박혔는데도, 우리 또한 내 주변에서 사라졌으면 좋을 사람이 여럿 있다는 사실. 자기 곁에 제발 얼쩡거리지 않았으면 좋을 보기 싫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넘어 때론 죽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저주의 마음까지 울컥거린다는 것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때론 그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하여 경악케 만듭니다.
자신도 교통 신호를 어기고, 때론 교묘히 세금을 빼돌릴 궁리를 하면서, 또한 온갖 편법과 악을 저지르면서도 TV 뉴스에 여러 범법자의 모습을 보면 ‘저런 것들은 다 죽어버려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는 모습은 우리 안에 이미 요나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모두가 자신의 아집과 독선에 빠진 분노의 마음인 것입니다. 요나는 하느님조차도 자신이 좌지우지 조종할 수 있는 신이라 생각하는 불경의 우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그러한 요나의 모습을 많이 닮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교우들 중에도 독선과 아집에 빠져 복수를 꿈꾸고, 편 가르기로 미움과 편협된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악한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끝내 분열하게 만들고 와해시키는 못된 요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 교우들은 하느님조차도 자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사이비 우상에 빠져 불경스런 기도와 요구를 하느님께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하게 분노하며 신앙까지 저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폐쇄적이지 않고, 자신들만 선택받았다는 이기적 선민사상의 독선으로 가득 찬 거짓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고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며, 세상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는 참 사랑의 아버지시라는 진리의 믿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요나는 이처럼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참사랑을 잊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반드시 동반되는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분노와 복수로 가득 찬 죽음의 불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같은 죽음의 신앙이 싹트고 있다면 내 안의 거짓된 독선의 요나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제게 말을 건네옵니다.
“과연 제 신앙이 편협되었고 뒤틀렸으며 복수로만 가득 찬 거짓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제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불경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 같은 그릇된 믿음을 진심으로 통회하고 뉘우칩니다. 과연 하느님은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모두가 진정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참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미원본당 주임)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삽화 _ 김 사무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건축 디자이너이며, 제주 아마추어 미술인 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중문. 강정. 삼양 등지에서 수채화 위주의 그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재 건축 인테리어 회사인 Design SAM의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