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영취산(고대 인도 마가다국 수도 인근에 있던 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셨다. 이 때 모인 사람이 무려 3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연히 법단이 좁았다. 그래서 야외에 단을 만들어 설법하셨다. 여기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는 말이 나왔다. ‘야단’(野壇)은 ‘야외에 세운 단’이라는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부처님 말씀을 듣기위해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질서도 없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멱살 잡고 싸우고, 서로의 주장으로 시끌벅적하고, 그런 난리가 없었다. 이것이 야단법석이다.
나는 하느님을 찾는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야단법석이었다. ‘특별하게 여겨지는’ 혹은 ‘있어 보이는’ 예수님 설법의 자리만 야단스럽게 쫓아다녔다. 바다에 사는 욕심 많은 물고기가 바다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격이었다. ‘붕~’ 떠서 살아가는 삶, 그것은 야단법석이었다.
일본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와 영국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은 「슈퍼 노멀」이라는 책에서 “우리 주변에 보이는 평범한 물건들에서 디자인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위대한 디자인은 거창하고 야단스러운 것이 아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접시가 가장 음식을 잘 담을 수 있는 최고의 디자인이고, 평범한 항아리가 가장 물을 잘 담아내는 최고의 디자인이다.
야단스럽지 않은,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 속에 위대하고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진다. 불교의 오래된 게송(偈頌, 부처의 공덕을 기린 노래)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해탈하기 전에 물을 나르고 나무를 패고, 해탈한 후에 물을 나르고 나무를 팬다.” 그렇다. 야단스럽지 않은, 평범한 일상 속에 해탈이 있다. 구원이 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 14,23)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금 하늘로 ‘슝’ 하고 날아올라, 나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슈퍼 영웅이 되라고 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그런 야단법석 속에 있지 않다.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 속에 하느님이 녹아들게 만드는 것이 먼저 아닐까. 만약 이런 신앙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마음과 몸’(靈肉)이 야단법석이다.
글 _ 우광호 발행인
원주교구 출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94년부터 가톨릭 언론에 몸담아 가톨릭평화방송·가톨릭평화신문 기자와 가톨릭신문 취재부장, 월간 가톨릭 비타꼰 편집장 및 주간을 지냈다. 저서로 「유대인 이야기」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성당평전」, 엮은 책으로 「경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