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위 시복 100주년 맞아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 주제 봄 학기 시작
100년 전인 1925년 7월 5일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로 ‘복자’가 탄생했다. 순교자 79위(기해박해 70위·병오박해 9위)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것이다. 1784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받고 돌아와 동료들과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를 세운 지 140년 만의 경사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는 올해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100주년을 맞아 19일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 주제 봄 학기 공개대학을 개강했다. 이민석(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의 종교정책과 79위 시복식’을 다룬 첫 강의에서 시복식이 열린 1925년 당시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한국 교회가 처한 상황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일제의 종교 정책은 일본 내지에서 실시한 종교 통제정책의 연장선이자 더 가혹한 적용이었다. 겉으로는 정교분리를 주장했지만, 실상은 조선 내 종교를 억압·통제하려 들었다.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를 통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이데올로기 확립을 위해서였다. 이 연구원은 “1910년대 이미 총독부는 자생적 성격이 강한 불교와 유교를 장악한 상태였다”며 “서양 열강 세력과 연계된 가톨릭과 개신교 등 그리스도교에도 불리한 법령과 제도를 만들고 선교사를 감시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고 말했다.
1919년 전국적인 3·1 운동에 충격받은 일제는 기존 무단통치 대신, 문화통치라는 미명 아래 실제로는 ‘민족 분열 통치’를 자행했다. 종교 세력에도 전보다 많은 권리를 허락하며 환심을 사려 들었다. 이 연구원은 “특히 총독부는 개신교 신자들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배경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회유와 포섭하기 위해 종교과를 신설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제는 가톨릭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선교권 보장을 위해 신자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금지한 까닭에 장애 요인으로 보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시복식에는 극히 드문 인원만 참여할 수 있었다.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들어서였다. 이 연구원은 “경성(서울)에서 로마까지 가는 데 40여 일이 소요됐으며, 총 비용은 경성 5인 가족 20개월 생활비인 1200원이었다”고 밝혔다.
이런 비용 때문에 시복식에는 뮈텔·드망즈(대구대목구장) 주교와 함께 한국인 전체 신자 10만 명 중 단 3명 만이 동참했다. 「경향잡지」 발행을 맡은 한기근 신부와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장면(요한)·장발(루도비코) 형제였다. 한 신부는 이후 「경향잡지」 에 로마여행일기를 연재했다. 공개대학은 5월 14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진행된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