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주로 저학년들을 가르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철학을 먼저 배우거든요. 특히 신입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보람이 쏠쏠하지요. 참 대견합니다.
올해 광주가톨릭대학교 신입생은 수녀님 3명, 사제 지망 수도자와 교구 신학생들을 합해 17명까지 모두 20명입니다. 신입생들이 한아름의 꽃다발이면, 아직 활짝 피지 않은 꽃망울 다발 같은 것이겠죠. 각자 나름의 어려움을 갖고 시작합니다. 그 시절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성격적으로 성숙해가는 단계일 수도 있고,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수도 있고, 기도가 서툴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정말이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지한 구도자들입니다.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자 하며, 그분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합니다. 모두 희망에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어두운 시기를 살다 간 샤를 페기는 그의 시 ‘희망의 신비로 향하는 문’에서 희망을 두 언니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나는 작은 소녀로 묘사합니다. “작은 희망은, 두 언니 사이에서 걸어가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언니들이 이 작은 소녀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이 작은 소녀가 특유의 쾌활함으로 언니들을 이끌고 있다고 말합니다. 두 언니는 물론 사랑과 믿음이지요.
“그녀, 그 작은 아이가 모두를 짊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오직 있는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는 앞으로 있을 것을 본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직 있는 것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는 앞으로 있을 것을 사랑한다.”
희망이 믿음과 사랑을 이끈다는 말이 참 새롭게 다가옵니다. 만만치 않은 순례길을 마음을 다잡고 걸어가는 언니들, 불신의 유혹이 가득하고 정의보다는 이해관계를 따라 편 가르기 하는 세상의 진탕 속에서 올바르게 살기 위해 이를 앙다무는 믿음과 사랑 두 언니는 어린 동생인 희망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혹시나 떠밀려 그 건조한 길을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가루가 되어 의미 없이 스러지고 말겠죠. 한 걸음 한 걸음, 즉석에서 지은 아무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들의 손을 이끄는 이 어린 동생과 함께하기에 믿음과 사랑 두 언니는 그 순례를 계속하고 그 길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올해 대희년을 지내는 교회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란 주제로 우리를 희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참 힘든 세상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제 마음을 절망으로 이끄는 이유도 차고 넘치고요. 세계 정세도, 우리나라의 사정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도, 전쟁과 사건 사고들도 우리 마음을 돕고 있진 못하고요. 교회는 무슨 권리로, 무슨 생각으로, 우리에게 희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힘내! 정신 차려! 하는 것이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을 겁니다.
이런 제 마음에 어린 소녀 희망이 풀쩍 뛰어듭니다. “그래, 그래도 한번 해보자.”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어린 소녀 희망은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형들을 마주한 이집트의 요셉에게 사랑할 용기를 넣어줍니다. 가산을 탕진한 동생을 환영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큰아들에게 필요한 것도 이 희망이었을지도요.
그러면 넌 누굴 따라가는 거니? 어린 소녀 희망에게 묻는다면, 그녀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냥 씨익, 무얼 묻는지 몰라 미소 짓겠죠. 우리 신학교를 이끌고 있는 것도 분명 파릇한 신입생들이고, 교회를 이끌고 있는 것도 결점투성이의 우리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작은 희망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