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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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부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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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 부르는 하느님의 이름은 그 호칭에서 그가 놓여 있는 삶의 자리가 드러난다. 사랑이신 하느님, 치유의 하느님, 인도자이신 아버지 등등, 상처받아 외롭다거나, 병고에 시달리거나, 참회의 길에서 자비를 구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굽어살펴 달라는 일종의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하느님의 보살핌이 몸으로 느껴지지 않고, 때론 교회공동체로부터 상처를 받기까지 하는 경우에 겪게 되는 좌절감은 하느님과 1;1의 관계맺음이 아니고는 치유되기 어렵다고 본다.

 

나의 하느님, 나만의 하느님을 찾아 영적 순례에 나섰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주일미사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 마음의 평화, 신학자들이 구사하는 사변적 용어들로부터 소외된 신심을 어떻게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교리신학원에 수강등록을 하였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있고, 각자에게 필요한 방식대로 은총을 베푸신다는 막연한 이야기로는 위로를 얻지 못하였기에 첫 수업에 대한 기대감은 컸었고, 드디어 강사 신부님께서 시작기도를 하셨다.

 

 

“무어라 부를 수 없는 창조주여, 당신은 빛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의 시작이라 불리오니, 저에게 오시어 제 영혼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은 어린아이에게까지 말씀의 능력을 주시니, 제 입이 당신을 흠숭하는 찬미로 가득하게 하소서. 제게 예리한 기억력과 섬세한 해석의 능력을 주소서. 저의 시작을 질서 지워주시고, 그 진보를 이끌어 주시며, 그 마침도 당신으로 채워 주소서. 아멘!”

 

 

‘무어라 부를 수 없는 창조주!’ 아, 세상에 이런 기도문도 있었구나! 무어라 부를 수 없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되는 이름이 있었구나!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기도문의 원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공부하며’라 했다. 진위 여부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대 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나처럼 그렇게 먼 곳에서 간절히 서 계셨던 증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용기가 솟았다. ‘야훼’로 불리기도 ‘엘로힘’으로 불리기도 했던 하느님 호칭의 역사도 알게 되고, ‘이거다’하고 정의하고 나면, 이미 그 외연의 울타리 바깥에 서 있는 하느님이라서 수많은 학자들이 시도했다는 ‘신 존재 증명’이라는 학설도 흥미로웠다. ‘무어라 부를 수 없는’이라며 하느님의 오지랖을 파고들면 얼마나 많은 위로가 흘러 들어오게 되는지 느끼게 되어, 그 당시에 속기로 받아 적었던 기도문을 나는 지금도 종종 지인들에게 건넨다. 물론 나도, 하얀 화선지 위에 물을 뿌리듯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그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다.

 

 

비워진 그릇, 맡겨진 의지, 이끄심대로 따르는 순명을 위해 나는 얼마나 열려 있는가를 살핀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예술현장에서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단절이 도처에 만연하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이 자진해서 반납한 에고(ego)들은 신에 의해 재생되어 더 큰 선물로 되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언제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날이면 바뀌게 될 호칭이지만,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따뜻한 포옹이 되어주는 셀프서비스, ‘무어라 부를 수 없는 나의 하느님!’ 조용히 불러보면, 뭐랄까 욕조에 몸을 담그듯 스르르 눈이 감기는 평화가 감겨져 온다.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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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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