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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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예수님의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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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시 <황무지>에서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의 시인 용혜원은 <목련꽃 피는 봄날>에서 4월의 대표적인 꽃 목련을, ‘삶을 살아가며 가장 행복한 모습 이대로 피어나는 꽃’이라 했습니다. 가장 잔인함을 체험한 뿌리라야 가장 행복한 꽃을 피울 수 있나 봅니다.


예수님의 4월이 그러했지요. 참으로 기막힌 잔인함의 삼 일이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성삼일이라네요. 가장 거룩한…


지난 겨울 우리 집 위층에서는 새로 이사 온 주인의 대대적인 집수리가 있었습니다. 중학생 정도의 소년과 그 소년의 어머니가 집을 수리하겠다며 동의서를 받으러 왔는데, 공사 일정을 물으니 얼마나 걸리는지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작은 공사를 해도 연락처랑 일정, 공사 내용을 정확하게 게시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상례인데, 더구나 병원에서 퇴원한 남편이 종일 집에 있는데 바로 위층이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러나 집을 장만하고 수리하고 이사 오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기쁠지 생각하니,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환자가 있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었습니다.


곧이어 업체의 연락처도 주인의 전화번호도 없는 종이 한 장에 일정이 20일이나 걸린다는 게시물이 승강기 벽에 붙었습니다. 공사 기간이 길어서 일부러 모른다고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화가 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했어도 서명을 해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큰 소음과 진동으로 2~3일은 힘들었지만, 무리 없이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안심할 즈음, 현관문 앞에 놓인 예쁘게 포장된 작은 화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야생화처럼 겸손하고 다소곳하고 작은 얼굴을 가진 예쁜 꽃 속에, 메모지가 꽂혀 있었습니다.


‘덕분에 수리 잘하고 어제 이사를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꽃의 이름이 ‘꽃기린’이며,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선한(?) 이웃이 되어주려 했던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 것에 화가 났었는데, 솔직하게 말 못 한 그 이웃도 화분을 준비하면서까지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뿌리와 꽃이 다르듯 우리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참 많이 닮은 이웃이었습니다.


그 꽃의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예수님의 꽃)인 것을 후에야 알았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예수님의 꽃, 꽃기린의 가시에 손이 찔려 아픈 손가락의 피를 훔치는데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보시며 이런 기도를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리고 저도 잠시 멈추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당신 계명을 떠나 헤매지 않게 하소서.”(시편 119,10)


주님의 성삼일은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뿌리를 가진, 가장 행복한 꽃들의 시간입니다.


글 _ 박명순 드보라(수원교구 초월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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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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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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