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1일 오전 7시35분(로마 현지 시각) 거처하던 교황청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교황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자 당일부터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신자들이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미국, 캐나다 등 아메리카
교황이 태어난 곳이면서 제266대 교황에 즉위하기 전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으로 재임했던 아르헨티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교황은 라틴아메리카 출신 첫 교황이기도 했다. 교황 선종 소식이 전해지자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호르헤 가르시아 쿠에르바 대주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봉헌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모든 이들의 교황이자 가난한 이들의 교황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교황이기도 하셨던 교황님은 분열된 아르헨티나가 일치되기를 원하셨다”고 밝혔다. 쿠에르바 대주교는 또한 “이제 우리는 조금 더 교황님을 닮고 서로에게 자비로워져야 한다”면서 “우리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큰 추모는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 대화를 나누고 갈등을 멈추는 것”이라고 요청했다.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역시 교황 선종 당일인 21일 성명을 통해 “겸손하게 세계 교회를 이끌었던 교황님이 신앙과 생명을 증거하고,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교회는 교황이 재임 중 고향에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끝내 이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 주교회의 의장 티모시 브롤리오 대주교도 21일 발표한 성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와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게 보여주셨던 관심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라며 “교황님은 2013년 3월 즉위한 뒤 지구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을 새롭게 하셨다”고 강조했다.
미국 주교회의 성명과 별도로 시카고대교구장 블레이스 수피치 추기경, 뉴욕대교구장 티모시 돌란 추기경 등도 추모 메시지를 발표하고 깊은 슬픔과 함께 교황이 보여준 12년간의 사목활동에 감사함을 드러냈다.
수피치 추기경은 “우리가 교황님을 추모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교황님이 요청하신 대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미국 워싱턴 D.C. 원죄없는 잉태 성지 대성당은 외벽에 교황 선종 추모 휘장을 내걸었으며, 교황의 출신 수도회인 예수회가 운영하는 미국 ‘예수회난민봉사기구’(JRS) 켈리 라이언 대표도 “교황님이 남긴 유산을 이어받아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어진 역할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캐나다 주교회의도 교황 선종 직후에 성명을 내고 “교황님은 우리에게 신앙과 희망, 사랑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라는 사명을 주셨고, 전 세계에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셨다”며 “교회가 야전병원으로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줘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신 모습은 우리에게 평화와 동정, 자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가자지구
프랑스교회에서도 뜨거운 추모 열기가 일고 있다. 프랑스 주교회의는 21일 의장 에릭 드 물랭 보포르 대주교 명의로 애도문을 발표했다. 물랭 보포르 대주교는 애도문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찾아온 이민자들에게 프랑스와 유럽이 마음을 닫으며 자신의 영혼을 잃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했던 그 절박하고도 감동적인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전했다. 이어 "인류에게 기후 위기 앞에서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고, 사회적 불의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길 요청하며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었던 그분은 실로 자비와 희망의 희년을 선포한 교황이셨다"고 기억했다.
수도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추모 미사와 철야 기도회가 펼쳐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21일 정오부터 신자·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정오와 오후 6시 두 차례 추모 미사, 오후 8시부터 철야 기도회가 이어졌다.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노트르담 대성당 모두 정오에 교황이 향년 88세로 선종했다는 뜻에서 88번 타종했다.
교황이 2023년 9월 방문했던 마르세유에서도 마르세유대교구장 장 마르크 아블린 추기경 주례로 21일 오후 7시 라마조르대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봉헌됐다. 스페인과 맞닿은 남서부 시골과 소도시들로 이뤄진 바욘-레스카르-올로롱교구에서는 21일부터 24일까지 15개 본당이 각각 추모 미사와 철야 기도회를 열었다.
스페인 언론인이면서 2019년에 「친근한 교황」(El papa de la ternura, The Pope of Tenderness)을 발간한 에바 페르난데즈도 교황 선종 소식을 접한 뒤 “교황님은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동정심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고 추모했다.
교황이 생전에 평화 정착을 갈망했던 곳인 가자지구 그리스도인들도 성가정성당 등에 모여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등 교황의 선종을 애도했다.
필리핀, 중국, 대만 등 아시아
필리핀교회는 교황이 생전 필리핀에 몸소 보여주고 안겨 줬던 위로의 일화들을 뜻깊게 상기했다. 마닐라대교구장 호세 아드빈쿨라 추기경은 21일 추모 메시지를 통해 교황이 2015년 필리핀 방문 시 7000여 명의 사망·실종자를 발생시킨 필리핀 사상 최악의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타클로반을 찾아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을 강조했다.
아드빈쿨라 추기경은 “이재민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하신 그 모습으로 교황님은 우리에게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다”고 전했다. 이어 “이렇듯 우리의 ‘로로키코’(lolo kiko, 교황의 타갈로그어 별명)는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알려 주셨다”고 덧붙였다.
필리핀 주교회의 의장 파블로 비르질리오 데이비드 추기경도 메시지를 통해 “교황은 특유의 재치와 따뜻함으로, 해외에 나간 우리 이주노동자들이 신앙의 밀수꾼들‘(contrabandistas de la fe)로서 국경을 넘어 사람들을 감동하게 할 수 있음을 상기해 주셨다”고 추억했다. 이는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신앙을 실천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정작 선교사들조차 닿지 못하는 세계 곳곳에까지 복음을 전파해, 마치 ’밀수꾼‘처럼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톡톡한 역할을 해 낸다는 격려를 표현한 말이다.
필리핀 전국 교구들에서도 추모 미사와 타종이 이어졌다. 마닐라대성당은 21일 오후 6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햇수로 13년에 걸쳐 재임했음을 기리는 뜻에서 13분 동안 종을 울렸다. 이어 22일 오전 9시 마닐라 시민들이 애도의 촛불을 들고 참례하는 가운데 추모 미사를 봉헌했다. 불라칸주에 있는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성당은 88번 종을 쳤다.
대만과 홍콩 등 중화권 교회들도 열렬한 추모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만 주교회의 의장 리커몐 주교는 21일 오후 8시 기자회견을 열고 “대만 전역 본당들에서 교황을 위한 미사와 기도를 올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대만 주교단은 22일 타이베이대교구청에서, 25일 타이베이 원죄 없는 성모 주교좌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각각 봉헌했다.
또 교구청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시민들에게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하고 있다. 홍콩교구장 초우 사오얀 추기경은 21일 추모 메시지를 통해 “종교 간 대화 촉진, 세계 평화 증진, 여성의 교회 내 의사결정 참여 확대 등 교황청 개혁에 강한 의지를 보인 교황님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전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