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Immanuel)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임마누엘은 도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기 위해서 몸소 인간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동떨어진, 인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기 위해서 맨 먼저 무엇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기 위해서 먼저 인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다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을 부르시고 협조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부르심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창조주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인간을 부르셨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도움을 통해서, 인간의 협조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바로 구원의 초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것은 당신 구원사업에 협조해 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의 협조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말씀으로 인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협조해 달라고 손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마리아와 요셉은 기꺼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응답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며 손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 주님. 당신의 손을 꼭 잡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을 꽉 잡을 때, 그때 비로소 하느님은 우리와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닌, 우리와 동떨어진 하느님이 아닌,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하느님의 손을 꼭 잡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탄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도움과 협조를 요청하십니다.
“얘야, 나는 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단다. 나는 너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그러니 제발 나를 도와다오.”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며 따뜻한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을 꼭 잡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 이렇게 응답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 주님. 당신의 손을 꼭 잡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응답 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마음속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Immanuel)이 되셔서 오실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젊은이는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을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발자국 옆에 또 다른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그 젊은이는 하느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느님! 제가 걸어온 제 삶의 발자국 옆에 또 하나의 발자국은 도대체 누구의 발자국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발자국은 바로 나의 발자국이다. 너는 잘 몰랐겠지만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걸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어떤 때에는 자신의 발자국 옆에 하느님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또다시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왜 어떤 때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아라. 내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을 때 네 인생에 있어서 어떤 때였느냐?”
젊은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로 자신이 살아오면서 그때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고 힘든 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하느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그때는 바로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는 그때 저와 함께 걸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그때 너무나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기에 내가 직접 너를 업고 걸었단다.”
글 _ 이창영 신부 (바오로, 대구대교구 대외협력본부장)
1991년 사제 수품. 이탈리아 로마 라테란대학교 대학원에서 윤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교회의 사무국장과 매일신문사 사장,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대교구 경산본당, 만촌1동본당 주임, 대구가톨릭요양원 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