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철 신부 예수회 이주노동자지원센터 김포이웃살이 의료·복지 담당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목이 나온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앤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그 애는 나비를 수집하니?’ 따위의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앤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니? 몸무게는 얼마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니?’ 따위만 묻는다. 그래야만 어른들은 그 애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고 믿는 것이다.”
나도 사도직 현장에서 비슷한 것을 느끼곤 한다. 이주민이 생소한 사람들일수록 통계적 수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신부님, 센터에 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오나요?”라든가 “요새는 미등록(불법) 체류 외국인이 얼마나 되나요?”라는 식의 질문을 받을 때도 있고, “임금체불액이나 수술비가 어느 정도 나와서 걱정이에요”라고 지나가는 말로 꺼내기라도 하면, 내가 진심으로 소개하려던 그 사람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것들은 우리가 이주민들과 물리적으로 멀리 있다기보다 심리적으로 멀리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 마음은 그 어떠한 수치나 통계보다 사연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이처럼 비록 우리는 편의상 이주민들을 같은 비자·국적·성별·직업 등으로 묶어서 보고 싶어 할지라도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성품이 다르고 살아온 역사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선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면 정말 신기하게도 사람이 보인다. 예상 외로 애완동물로 고양이를 키우는 이주민도 보이고, 햇살 좋은 날 아기 옷을 아주 깨끗하게 세탁해 기름때 가득한 공장일지라도 건조대를 세워 놓아 마치 돌담에 핀 꽃을 연상케 하는 깔끔쟁이 이주민 산모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횡단보도에서 워커(보행보조기)에 의지해 불안하게 건너시는 한국인 할머니를 안전히 모셔다 드리기 위해 친구를 먼저 보내고 자신은 파란불 꺼지기 직전에 몸을 돌려 힘껏 달음질하는 어느 외국인 청년도 보았다. 그는 모처럼의 선행에 스스로 아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이주민의 사연을 편의상 비슷한 경우로 범주화해서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분명 하느님께서도 결코 우리를 그저 편의상의 시선으로 분류해 바라보지 않으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