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완주군청 대회의실에서 ‘고산 교우촌이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열린 전주가톨릭순교현양원 심포지엄에서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인삿말을 하고 있다. 전주가톨릭순교현양원 제공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발생한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로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인 금령을 포고하며 교우들을 탄압했다. 전라도 고산 지역에는 1789년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문한 윤지헌(프란치스코, 1764~1801)이 형의 순교 이후 고향 진산을 떠난 뒤 머물게 됐다. 윤지헌이 ‘고산현 운동면’(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주하면서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됐다.
전주가톨릭순교현양원(원장 김광태 신부)은 5월 29일 완주군청에서 ‘고산 교우촌이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완주 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 연구를 위한 제1차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강석진(개갑장터 순교 성지 담당) 신부는 개항기 조선의 혼란한 정세 속에 선교사들의 서한을 통해 고산 지역 선교사 및 교우들의 삶과 신앙을 발표했다. 강 신부는 동학군과 의병의 개혁 운동은 천주교 신자 박해로 이어졌으며, 개신교는 사회 참여와 물질적 지원으로 교세를 확장하며 천주교 입지를 위축시킨 배경을 설명했다. 강 신부는 “고산 지역 선교사들은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고통을 애민의 마음으로 바라봤다”며 “고산 교우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도 꾸준한 신앙생활을 영위했고, 동학도의 탄압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다”고 강조했다.
강 신부는 “선교사와 교우들이 일치를 이룬 신앙 전통은 천주교 신앙의 중요한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나눔과 형제애를 실천하며 살게 한 원동력이 됐다”며 “고산 교우촌 선교사와 교우들의 삶과 신앙은 전라도 지역을 넘어 한국 교회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고산 지역의 역사 지리적 장소성과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상’을 발표한 최진성(전북대) 교수는 “전라북도 북부의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는 산지는 충청도에서 피신한 신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특히 육로를 통해 전라북도 내륙산지로 이동하던 신자들에게는 이 지역 산지가 좋은 피신처였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고산 신자들은 산간벽지에 살면서도 성직자들과 교감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고 있던 지식인들이었다”며 “이후 가톨릭농민회 활동의 밑거름이 되어 지역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두헌(전주가톨릭순교현양원 연구위원) 박사는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와 저구리 공동체’ 발제를 통해 고산 저구리 공동체의 역사적 의의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이 공동체는 조선 초기 전라도 천주교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던 진산 장구동 공동체 명맥을 이어받았으며 둘째, 신유박해 전에는 충청도까지 포용하고 이후에는 경상도와 강원도로 순교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