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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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쁜 독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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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으로 필사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게 독서는 두 번 읽는 것이었다. 눈으로 한번 읽고 손으로 쓰면서 한 번 더 읽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노트로 옮기기도 하고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단편은 아예 전체를 다 필사했다. 문장은 내게 스며들었고 필사는 습관이 되었다. 새해가 되면 두꺼운 노트를 준비하고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무술을 연마하는 듯 필사를 시작했다. 

 

연말이 되면 빛나는 문장들이 빼곡히 적힌 노트가 뿌듯하게 남았다. 필사를 하려고 독서를 하는 날도 많았다. 그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방송 원고를 보내고 맥주 한 잔을 옆에 두고 천천히 써 내려가는 필사였다. 원고를 쓰느라 쌓인 피로를 다른 글을 쓰며 풀었다. 좋아하는 책이 있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고 애정하는 색이 담긴 만년필이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매일 읽고 매일 쓰면서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라는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내 삶의 표어였다. 필사의 독서는 환희였고 보람이었으며 나의 성실한 습관이었다.

 

 

소리 내어 독서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필사 이전의 독서 방식이었는데 말 그대로 낭독을 했다. 눈으로 읽던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그 맛이 달랐다. 어떤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작가가 얼마나 리듬감 있게 쓴 글인지 느낄 수 있다. 시나 에세이를 읽을 때 특히 좋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정끝별 시인의 ‘은는이가’ 같은 시를 읽을 때면 가슴이 설레도록 좋았다. 

 

 

내가 쓴 시도 아닌데, 마치 내가 쓴 것처럼 나무 아래서도 읽고 창가에 앉아서도 읽었다. 시인이 쓴 시는 내 목소리를 통해 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날아갔다. 그럴 때 나는 읽는 게 아니라 노래한다. 그렇게 노래한 글들은 마음에 오래 남아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슴을 쭉 펼 수 있게 해 주었다. 낭독의 독서는 위로였고 기쁨이었으며 나의 비밀스런 독창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함께 읽는 ‘동아리’ 독서다. 다양한 독서토론 모임을 통해 벗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도서관 독서동아리, 동네 책방 책모임, 녹색평론 읽기 모임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모여 책을 읽고 밥을 먹는 모임까지. 15년 가까이 지속되는 모임도 있다. 함께 읽는 독서는 풍성해서 참 좋다. 혼자 읽을 때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책들만 읽게 된다. 어려운 책,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은 읽을 기회조차 없다. 

 

 

그러나 동아리에서는 책을 고를 때부터 다양성을 갖추게 된다. 모임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만큼 추천하는 책들은 전 분야에 걸쳐 무궁무진하다. 그뿐 아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해보면 하나의 책에서 탄생하는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만나게 된다. 혼자 읽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세상을 알게 되고 발견하지 못했을 문장들을 찾아낸다. 지루하고 힘든 ‘벽돌책’ 독서도 동지가 있어 밀고 끌어주어 완독을 가능하게 해 준다. 혼자 읽기도 좋지만 함께 읽기는 더 좋다.

 

 

책은 참 묘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참 한결같다. 책 속에는 분명 길이 있다. 하여 읽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길을 찾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길을 찾는 사람은 분명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신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독서의 축복이다. 필사를 하며 읽거나, 소리 내어 읽거나 함께 읽거나 어떤 방법도 좋다. 세상에 나쁜 독서는 없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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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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