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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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시간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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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으로 촬영을 다닌다. 지금은 그저 인적 없는 고갯길이고 갈대 흔들리는 강둑이나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장인 곳들. 그 한쪽 곁엔 표지판이 서 있다. ‘여순1019사건’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시다. ‘경찰은 이곳에서 주민 30여 명을 네 차례에 걸쳐 학살했다.’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이 작은 표지판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

 

무심코 지나쳤을 공간에서 시간을 본다. ‘기억은 평범한 순간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중에야 그들이 남긴 상처에 의해 기억된다’는 크리스 마크의 말처럼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 남아 있는 공간, 그 상처들이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10여 년 전, 남편은 혼자서 한국과 일본에 남겨진 터널과 굴, 참호와 진지, 탄광을 찾아다녔다. 컴컴한 지하에 들어가서 별로 찍을 것도 없는 굴 속을 촬영하기 시작한 지 4년, 대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따라가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지하 공간에 살았던 또 일했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온천으로 알려진 관광지인 일본 미이케 탄광. 그곳은 92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나가사키의 하시마섬과 조선소도 마찬가지다. 그곳뿐 아니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오름 360여 개 중 120여 개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결호작전’의 지하 진지였다. 송악산에도 수월봉에도 일출봉에도 제주도민들의 노동과 굶주림과 고통으로 만들어낸 지하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는 그야말로 온 섬이 눈물 구멍이었다. 내가 선 땅의 시간을 알아가면서 그 공간들이 새롭게 보였다. 그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고 해서, 그저 웃고 먹고 떠들며 놀다 올 수는 없었다.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선 이 땅, 저 아래는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시간이 남겨져 있다. 마을 입구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의 나고 자람을 지켜보며 나이테를 넓혀왔듯이, 이 땅에도 그 위에서 살던 사람들의 시간이 스며들며 쌓여왔다. 어떤 땅은 슬픔이 가득 차 있고 어떤 땅은 한이 서려 있고 어떤 땅은 축복이 깃들어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땅, 그 공간의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슬픔이 있다면 위로를, 한이 있다면 해원(解?)을, 축복이 있다면 감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간의 맨 끝, 시간의 겹 맨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 끝에, 그래서 맨 앞이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슬픔과 한이 서린 공간에 가게 된다면, 먼저 그 공간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더듬어 살필 수 있는 역사, 특별한 사건은 기억하고 충분히 애도하는 것. 그것이 맨 앞에 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그곳을 오래 걷거나, 풍경을 감상하고 또 즐거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시간을 그 공간에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의 시간이 모두 흘러넘치도록 말이다. 우리는 공동의 사건을 기억하며 위로하기 위해 표지와 기념의 장소를 만든다. 아프고 억울한 사회의 공동 기억은 지우거나 잊는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치유되기 때문이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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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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