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262×205, 캔버스에 유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 아들의 어깨를 짚은 아버지의 손을 보면 한쪽은 남자의 손, 다른 쪽은 여자의 손이다.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단 하나의 기도로서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대 근동의 많은 신들은 남신과 여신으로 나뉘어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심지어 신들 사이에서 불륜도 일어나죠. 인간의 세상을 신의 세계에 투영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유일한 하느님의 성을 그처럼 남성이나 여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그러한 신관을 따른다면, 홀로 예수님을 낳은 하느님은 자웅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지만, 그분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여성성을 제거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모습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느님께서 여성적인 온유함을 갖고 계심을 잘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의 여성적 온유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대표적 그리스 단어 하나를 봅시다.
오이크티르모스(ο?κτιρμ?ς).
이 단어는 연민을 뜻하는데, 모태(母胎)와 관계있습니다. 즉, 어머니가 자기 몸 안에 품었던 아이의 삶이 어떠하든지 항상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듯이, 하느님도 비록 우리가 죄인이어도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마지막 문장은 직역하면, ‘내 모태가 요동친다’입니다. 하느님은 자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당신 백성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다른 말씀도 들어봅시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 11,3-4)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이사 66,12-13)
성경에는 하느님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말씀이 놀랄 정도로 많습니다. 하느님은 심지어 인간에게서 여성성 혹은 모성이 사라진다 해도 당신의 여성성은 영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가엾이 여기셨다는 표현이 종종 나옵니다. 이 표현도 본디 모태가 요동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예루살렘을 두고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루카 복음 15장에 수록된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느님의 남성성뿐 아니라 여성성이 보입니다. 복음은 아버지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루카 15,29 참조) 이 표현은 직역하면 ‘모태로부터 연민을 느꼈다’입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그린 성화에서 하느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짚은 아버지의 두 손을 자세히 보시면, 한쪽은 굵고 투박한 남자의 손이고 다른 쪽은 가늘고 섬세한 여자의 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온유함이 여성들만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남성적인 온유함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남성적인 온유함을 특히 아가서에서 신랑의 비유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당신의 신부인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시선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한지요.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