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주로 하느님을 아버지, 남성으로 표현하고 어머니, 여성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적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차별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의 여성성은 성경에서 아예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우리 인간과 같은 성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이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70항)
그런데도 굳이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부모로서 동등합니다. 하지만 몸소 태중에 자녀를 품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가 친밀성을 강조하기에 적합하다면, 몸 밖에서 자녀를 낳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구분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구분되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점,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의 집착이 심한 경우, 즉 자신과 자녀를 일체화할 때 자녀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부모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 불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범신론과의 차별화 때문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구분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신이고 신이 곧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관에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관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도를 닦아 해탈에 이르는 구원을 말합니다.
물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해서 그분이 인간 아버지와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같은 아버지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들으며 하느님께 대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자기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이 생각나서 그런 것이죠.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와 다른 분이시라고 합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시편 27,10)
하느님의 온유함은 인간 아버지의 온유함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아버지의 이미지를 하느님께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아버지이신지 알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요한 1,18)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마르 14,36)
‘아빠’는 어린이의 언어입니다.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강하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으로 신뢰하는 어린이가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루카 15장에서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을 가장 훌륭히 보여주십니다. 자신이 살아있음에도 마치 죽은 것처럼 유산을 요구하여 받아 떠나서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떠한 죄를 얼마나 크게 자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온유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20절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어떻게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매일 동구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원망이 아니라 염려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청하기 훨씬 전에 아버지는 이미 그를 용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회개를 앞섭니다. 우리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 즉 돌아감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여 용서를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지고 있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는 예수. 의정부교구 마재 성가정 성지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다시 만난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요한 21,5)
여기 사용된 ‘얘들아’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이데이아’는 7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가리킵니다.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괘씸한 제자들이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온유함을 그대로 품은 예수님의 눈에는 마냥 그들이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온유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