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시간이 다가오자 여덟 분 정도의 남자, 두 분의 여자 선생님이 모여 앉았다.
시작 1분 전 종을 울리던 황 선생님이 짧게 내 소개와 함께 질문의 의도가 느껴지는 질문을 넌지시 던지시며 모임을 시작한다.
”에. 오늘 저희 모임에 신부님께서 참석하시는데 반대하실 분 없으시죠? 없으시리라 알고 오늘은 공개 모임으로 전환하겠습니다.”
레지오 회합 분위기와 거의 흡사한 A. A. 모임(Alcoholics Anonymous,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 모임)은 먼저, A. A. 서문과 12단계와 12전통을 돌아가며 읽는다. 그리고 항상 ‘알코올중독자 OO입니다’라는 소개를 한 뒤 자신이 읽어야 할 부분을 읽는다.
15분 정도 형식적인 수칙과 책을 읽은 뒤 개인의 경험담을 나눈다. 정확히 한 시간을 지키기에 보통 4명 정도의 경험담을 들으면 모임이 끝난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여기 계신 분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긴장이 되었다고 한다. 마치 고해성사처럼 사제에게 자신의 과거와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은 마음에.
‘저분은 패션 스타일이 독특하시네. 왕년에 좀 노셨던 분이신가.’
‘저 젊은 여성분은 왜 이 모임에 나온 거지? 저분도 알코올중독에 빠졌다니. 젊은 여성들도 알코올중독에 걸리는구나.’
‘문 선생님은 역시 예상대로 조폭 출신이구나. 거침없이 욕을 내뱉으며 경험담을 말씀하시네.’
‘아…, 저분은 아직 회복 중이신가 보네. 실내가 이렇게 따뜻한데 몸을 자꾸 떨고 계시네.’
어느새 처음의 긴장은 모두 사라지고 찬찬히 한 분 한 분의 옷과 신발 그리고 표정들을 들키지 않게 관찰하였다. 그리고 사라진 긴장만큼 사라진 무엇을 느꼈다. 바로 이 모임 참석의 이유였다.
사제로 살아온 지 짧지만 그래도 10년이 넘었다. 첫 모임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 이분들의 간절함이었다. 이분들은 살기 위해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다.
어떤 동호회의 성격으로 모이는 것도 아니며, 친분을 쌓기 위해 시간을 내서 온 것도 아니었다. 술을 끊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경험들을 이미 하였기에, 그 경험을 통해 얻은 새로운 경험은 자신이 살기 위해 마지막 선택한 길이 바로 A. A.였던 것이다. 살기 위해 애쓰는 분들의 경험을 통해 나의 개인적 목표를 채우는 건 그분들에 대한 도리도 아니며 사제로서의 양심에도 편치 않는 일이다. 괜히 처음에 세 분의 선생님에게 연구자로서 왔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분들에게 불편함을 드린 건 아닌지 후회까지 되었다.
‘첫 모임인 오늘을 마지막 모임으로 하고 다른 중독이나 다른 주제를 알아봐야지. 끝나자마자 인사만 드리고 자리를 떠나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마지막 평온함을 청하는 기도를 마친 뒤 일어나려는 순간,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서 이제까지 많이 느꼈던 신자분들의 간절한 눈빛을 똑같이 볼 수 있었다.
“신부님. 저는 000이라고 해요. 원래 이렇게 자기 이름 여기에서 밝히면 안 되는데. 저도 신부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신부님, 저도 미국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었습니다. 사례연구하시나 봐요. 나중에 편안한 시간 말씀해 주세요. 이건 제 명함.”
“음…, 음… 아까 너무 욕을 심하게 해서 놀라셨죠? 경험담만 이야기하면…. 신부님…, 저 같은 사람도 신부님과 이야기할 수 있나요?”
아무도 모르게 처음처럼 로만칼라를 만지작거렸다.
천주교 신자분들도 계셨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도 사제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다니.
이분들의 예상치 못한 두드림에 내 인생에 중독이라는 만남을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
글 _ 이중교 신부 (야고보, 안양시 장애인보호작업장 벼리마을 시설장, 사회복지학 박사)
2009년 사제품을 받았다. 2021년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여성 알코올의존자의 재발과 회복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양시 장애인보호작업장 벼리마을 시설장이며, 서강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