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든 아니든, 좌파든 우파든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가치들이 있다. 자유·평화·환경 보호·민주주의 같은 단어들은 누구나 말만 꺼내도 고개를 끄덕인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 이런 가치를 거스르는 일이 생기면 우리나라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언론도 목소리를 높인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이는 우리 시대의 매우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징표다.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잘 활용해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다리를 놓고 대화를 만들어갈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주제들은 교회 안에서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묻혀 있다. 중요한데도 말이다. 나에겐 여섯째 계명과 아홉째 계명이 그 대표적인 예다. 요즘 많은 이에게 이 계명들은 ‘선택 사항’처럼 여겨지고 그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얼마나 인기 없는 주제인가? ‘순결’이라는 단어를 강론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였는가? 혼전 순결·피임·시험관 수정·자위·야동 같은 주제는 세례 교리나 혼인교리 받을 때 언급되었는가? 이런 대죄들은 아예 금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어려우면서도 필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순결은 부정적인 미덕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미덕이며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이다. 몸도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그분의 외아들이 인간이 되어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셨다. 우리 몸은 성령의 성전이기도 하다. 성(性)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깊고도 강력한 표현 중 하나다.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사랑의 행위다.
문제는 이 선물의 목적이 ‘주는 것’에 있는데 그 목적을 잊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때 생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사랑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그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낭비하고 만다. 다시 말해 모든 부정한 행위는 타인을 향한 사랑을 나 자신에게 잘못 돌린 결과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유혹은 늘 우리 곁에 있고 요즘 사회는 이 미덕을 실천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도 때때로 죄 짓고 넘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려는 마음이다. 많은 사람이 ‘이건 애초에 불가능해’라고 생각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한다. 아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런 삶의 방향은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 20살에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다고 해도 머리로 이 내용을 다 이해하고 삶으로 실천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려면 왜 교회가 이렇게 가르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분을 사랑하면 이해되지 않아도 따르게 된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다. 그리고 사랑의 가장 큰 표시는 성체성사이니 자주 성체를 모시려고 노력하면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게 죄인지 아닌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필요하다.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으면 나도 아파야 한다. 그 아픔이 우리가 용서를 청하게 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그분께 나아가게 한다.
이 미덕은 한때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사회도 이를 참된 사랑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야말로 이 미덕을 온전히 살아내며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줄 책임이 있다. 우리가 순결을 진심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다시 그 안에서 참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