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는 밖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내 것은 네 것이요 네 것도 네 것, 내 것 네 것, 네 것 네 것, 몽땅 네 것이야!”라고 한다. 그 대신 놀부는 안쪽을 향해 두 손을 감싸 안으며 “내 것은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 내 것 내 것, 네 것 내 것, 몽땅 내 것이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흥부의 삶을 탓한다. 흥부처럼 세상을 착하게만 살 수 없으며,놀부에게 구박받고 항상 손해만 보며 사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착하고, 가난하게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흥부 놀부 이야기를 교과서를 통해 배우면서, 어떻게 했는가? 흥부가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며 진한 인간애를 발휘하고, 나중에 복을 받는 삶에 감동하면서 박수
를 보냈다. 그리고 놀부의 삶에는 야유를 보내며 손가락질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모두 ‘너와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너 없는 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너와 내가 어울려 하나가 되면 ‘우리’라는 공동체(共同體)가 형성된다.
‘우리’라는 공동체 정신은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간직해 온 삶의 철학(哲學)이요, 우리의 고유한 미풍양속(美風良俗)의 뿌리였다. 또 이웃과 함께 정을 나누며 살아가게 한 민족의 얼이기도 하고, 찌개 한 그릇을 가운데 두고 서로 권
하면서 가족애(家族愛)를 만들어준 사상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나’ 개인보다 ‘너’를 포함한 ‘우리’를 더 중요시해온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삶의 지혜였다.
예수님은 공생활(公生活) 중반기쯤,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고 말이다.
여기에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올바르게 대답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지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반드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고난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ㄴ)라고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사탄(Satan)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고 꾸짖으셨다.
예수님은 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셨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의 계획에는 장애물(障碍物)이었고, 하느님과 인간을 아우르는 ‘우리’라는 공동체 관계를 깨뜨리는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베드로의 생각이 사탄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신앙인이면서 어느 순간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충동에 따라 ‘하느님의 일은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놀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흥부처럼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놀부처럼 살기도 한다. 그럴 때는 우리도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소리쳐야 한다. 그리고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너와 나’의 공동
체 정신으로 살겠다고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