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으로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입니다. 대표작품으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등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줄을 치고 가만히 앉아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것이 거미입니다. 그래서 거미형의 인간은 과거의 지식, 경험, 지위, 재산, 명성 등을 거미줄처럼 쳐놓고 가만히 앉아서 걸려드는 것을 먹고 사는 비생산적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형의 인간은 분주하게 열심히 일하면서 양식을 모으지만, 오로지 자신의 안일과 영달, 자기 가족이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나비형’ 인간입니다.
나비는 꽃에서 꽃으로 열심히 꿀을 얻지만 결코 한 곳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나비는 한 곳에서만 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에게 먹을 것을 남겨놓고 또 다른 꽃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런 나비형의 인간은 자유와 평화를 만끽하면서 풍요를 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이렇게 나비형의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나비형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모두의 소망이자 염원인 평화,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평화는 인류의 소망이자 염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그렇게 평화를 갈망하는데도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수 없습니다. 과연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생명의 희생 앞에, 그것도 어린 생명의 희생 앞에 무슨 명분이 있고, 무슨 정의가 있겠습니까?
평화는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결코 가만히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투쟁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심, 욕심, 탐욕, 자기중심, 불의와의 투쟁을 통해 자기를 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장은 문제가 없고 그래서 다툼도 없고 조용히 공존한다고 해서 평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서로의 ‘무관심’ 때문일 뿐입니다. 또한 문제를 의식하면서도 시끄러워지니까, ‘좋은 게 좋다고 그저 참지 뭐!’ 하면서 조용히 지낼 뿐입니다.
과연 조용한 상태가, 단지 시끄럽지 않은 상태가 평화로운 상태입니까?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모두가 갈망하는 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마찰하고 충돌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며 일치를 이룬 상태에서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합니다.
죄 중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죄 중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죄 중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죄 중에는 불안만 있을 뿐입니다.
죄 중에는 괴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죄 중에는 근심, 걱정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느님께서 주신 질서와 법, 특히 사랑의 법을 어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 후에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느껴본 적 있으시죠? 고해성사 후에 참다운 마음의 평화를 체험해 보신 적 있으시죠? 그렇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이 근심과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래서 참다운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에는 무관심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 자신이 갈망하는 평화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비형의 삶을 살지 않고 거미형의 삶, 개미형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평화, 참다운 평화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할 때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