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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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01)

[월간 꿈 CUM]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_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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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켈수스 도서관. 1만 5000권에 달하는 두루마리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117년 공사를 시작해 135년 완공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도서관을 보지 못했지만, 에페소 공의회 개최 당시 모인 주교와 사제들은 이 도서관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적대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 있습니다.”(1코린 16,9)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를 두고 “큰 문이 열려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에페소에서의 선교 효과는 컸다. 그 결과는 대규모 에페소 신앙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진다. 바오로 사도는 5년 동안 진행된 3차 선교 여행(서기 53~58년경)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2년 3개월 동안 에페소에 머물렀다.(사도 19,8.10;20,31참조) 이 에페소 거주 기간 동안 신약성경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이 작성되어 인편으로 각 지역에 배달됐다.

그런데 에페소는 원래 신앙에 부합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받던 에페소가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 기원전 334년이다.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된 것이 기원전 133년. 에페소는 그리스 로마의 신전이 넘쳐나는 다신교 숭배 도시였다. 그래서 에페소는 유일신 신앙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기원전 88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의 실라장군에 의해 진압됐다)

바오로가 에페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날을 상상해 보자. 장거리 여행으로 새카맣게 변한 발을 끌며 에페소 거리를 걷는 바오로 사도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당시 경제, 종교, 정치, 문화 중심지였던 에페소에는 2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업 및 무역 관련 유동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정치인, 교수, 물물 교환을 위해 장거리를 이동해온 사막의 상인, 군인, 여관업 종사자, 노예, 스포츠와 환락에 매료된 사람들로 에페소 거리는 북적였다. 바오로 사도는 걸을 때마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을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한 신전들이 거리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 북적거리는 번화가의 끝자락에 2만 5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극장이 있다. 이곳은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그 사건의 내막이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자세히 나와 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나오는 에페소 야외극장


관광지에 가면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다. 2000년 전 에페소에도 그런 기념품점이 많았는데, 가장 인기를 끈 기념품은 은으로 만든 아르테미스(다이아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신전 모형이었다. 은으로 만든 이 모형을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데메트리오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페소에서 기념품을 팔아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금알 사업에 찬물을 끼얹은 무리가 있었다. 바오로와 그 동료들이었다. 참다못한 데메트리오스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직업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바오로라는 사람이 오면서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때문에 우리 사업이 나쁜 평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를 당했습니다.”

데메트리오스는 바오로 때문에 여신과 관련한 기념품 판매가 저조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중을 선동했다. 그의 선동은 주효했다.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에페소인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시다!” 사도행전은 당시 상황을 두고 “온
도시가 혼란에 빠졌다”(사도 19,29)고 기록하고 있다.

다행히 바오로는 체포되지 않았다. 에페소 사람들은 바오로의 동행이었던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스와 아리스타르코스 두 사람을 붙잡아, 야외극장으로 끌고 갔다. 작은 행정관서가 아니라 야외극장으로 끌고 갔다는 점에서 당시 소요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바오로가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서려 했지만, 바오로와 친분이 있었던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흥분한 군중 앞에 나섰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소란은 서기관이 법정에서 별도로 문제를 다루자며 군중을 설득하기까지 두 시간 넘게 계속됐다. 서기관의 중재와 설득이 없었다면 당시 바오로의 동료는 물론이고 바오로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사도 19,23-30 참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에페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다는 점이다. 에페소 사람들은 원래 그리스 침략을 받기 전에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퀘벨레를 섬겼는데 그리스 지배 후, 아르테미스 여신으로 갈아탄다.

그런데 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는 심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인 후에는 성모 신심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아르테미스 신전 건축에 사용된 돌 및 기둥은 5세기 초 성모성당 건축 및 6세기 성모성당 증축 공사 때 재활용되었다.

 
유곽 안내 표지. 새겨진 발 크기보다 작은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표지판이라는 설, 유곽의 방향을 가리키는 도로 안내판이라는 설 등이 있다.


에페소에는 성모 마리아가 거주했다는 집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교회 역사상 성모께 최초로 봉헌된 대성당도 에페소에 있다. 더 나아가 431년 이 성모대성당에서 열린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 신심 관련 계시의 결정체인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 교의가 정리됐다.

에페소에서 유독 성모 신심이 강했던 이유, 그리고 에페소에서 시작된 성모신심이 전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할 듯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에페소가 없었다면 바오로의 서기 53~58년경 초기 교회 선교 동력은 약해졌을 것이고, 선교의 속도도 반감되었을 것이다. 에페소는 바오로의 말씀 선포에 귀 기울였고, 바오로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서기 100년경에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묘해진다. 바오로 이름이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도 요한의 이름이 들어선다. 이는 그리스 지역(코린토, 테살로니카, 필리피 등)과 달리, 아시아 지역에서는 사도 요한과 그 제자들의 영향력이 바오로보다 더 커졌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 요한 계열 제자들이 쓴 요한 묵시록에, 에페소가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에페소에는 사도 요한 및 성모 마리아와 관련한 대형 순례지가 많다. 사도 요한의 유해를 모신 성당,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살던 집이 그것이다.


글 _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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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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