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촌 주교님의 사목 여정은 말로만 전하는 사랑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된 증언이었습니다. 교회의 얼굴로서 사회와 마주하시되 언제나 그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존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온전히 살아낸 한 사제의 흔적을 보게 됩니다.”
18일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유경촌 주교의 장례미사에서 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한 말이다. 15일부터 이날 오전까지 명동대성당을 찾은 조문객은 2만 3000여 명에 달했다. 말이 아닌 삶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로 명동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유경촌 주교의 선종은 사회적으로 큰 울림을 남겼다. 그 울림은 사랑과 나눔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한 데에서 비롯됐다. 명동밥집을 찾은 이에게 따뜻한 국을 퍼주던 모습, 30m 아래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광고판 위에서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던 모습, 사회사목 담당 주교로 교회 안팎 사람들과 연대해온 모습, 26년간 몰고 다닌 프라이드 차량까지···. 그는 주교라는 고위 성직자의 자리에서 사치와 특권과는 철저히 거리를 둔 삶을 살았다. 빨래와 청소를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다는 증언, 가족이 사준 겨울옷을 노숙인에게 건넸다는 일화는 그의 청빈한 삶을 잘 보여준다.
유 주교는 신자들만이 아니라 비신자와 노숙인·장애인·자살 유가족·어린이 환우 등 고통받는 이들에게도 다가갔다. 그의 선종 소식에 비신자들의 추모글이 SNS와 언론을 통해 확산된 것도, 이미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처음 제가 주교품을 수락할 때의 각오는 ‘사람들의 발이나 닦아주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복음 장면(요한 13,14 참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중략) 주교품을 받은 지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발은 제대로 닦아주지 못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의 발도 닦아주지 못한 채···.”(유경촌 주교가 명일동본당 신자들에게 쓴 손편지 중에서)
유 주교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가난한 사람들 옆에서 더 함께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함께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전했다. 그의 삶은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라는 강렬한 인상과 신뢰를 남겼다.
손희송(의정부교구장) 주교는 페이스북에 “그는 신학생 시절부터 가난하게 살기를 원했고, 어렵고 힘든 이들 곁을 지키고자 했으며,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며 “주교가 된 후에도 이런 모습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철저히 그렇게 살고자 했다”고 털어놨다. 손 주교는 맑고 순수하게 사는 모습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너무 팍팍하게 사는 듯해서 안쓰러웠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임명받은 주교로서, ‘프란치스코 교황 Kid(아이)’였나보다”라고 회고했다.
유 주교를 향한 예상밖의 추모 열기는 한국 사회의 ‘어른 부재’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살아 생전 드러나기를 극도로 꺼렸던 유 주교의 진정성 있는 삶이 선종 후 더 큰 감동과 위로로 다가오며 추모 열기가 커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진정성 있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과 위로를 주는 어른을 갈망하고 있습니다.”(종교사회학자 김선필 박사)
김선필(베드로) 박사는 “유 주교님은 사회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선종을 계기로 삶의 족적이 뒤늦게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며 “그분과 함께 생활했던 동료 사제와 신자들로부터 미담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비신자들도 공감하게 되면서 추모 열기가 더 확산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 박사는 이어 “살아생전 유 주교님께서 보여주신 가난하고 소박한 행보는 우리가 찾던 참된 어른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셨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우리 사회는 너무 일찍 그분을 떠나 보내드렸지만, 이를 계기로 또 한 명의 어른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bonappetit@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