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가고 싶었던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500번지, 해발 620m 앵자봉 자락에 있는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를 순례했다.
성지 내 광암성당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100년 계획을 세운 ‘천진암 대성당 터’가 있다. 대성당 터 오른쪽 위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거기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다양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위쪽에는 이벽 성조 독서처 터와 아래쪽에는 천진암 강학당 터(天眞庵 講學堂址)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 젊은 선비 학자들이 천주학을 연구하던 곳이다. 온갖 새들이 울어대고 있다. 흔적은 아득하지만 그 시절을 생각해 본다.
18세기 조선 사회는 성리학의 변질로 인해 개혁의 목소리가 높았던 변동기였고,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 현실적으로 개혁하려는 실학사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박제가, 이덕무, 박지원 등 실학자들이 현실을 개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북학론을 펼친 것이다.
한편 이벽, 권철신, 정약전, 이승훈 등 젊은 선비들은 이곳 천진암 강학당에서 천주학 교리와 실학을 연구했다. 천주님께서는 세례받은 사람들을 하느님 자녀로 거룩하게 하시고, 떳떳한 자유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육신의 욕망에서 해방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경전에서 천주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이 땅에 평화와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학문과 문화도 알게 되었다.
유교의 한계, 적대적 법도에 닫힌 그 시대에 벽을 깬 것이다. 학문적 수준에 머물던 천주학을 종교적 차원으로 발전, 승화시켜 나갔다. 이들은 북학론에서 더 나아가 청나라 문화를 뛰어넘어 시야를 온 세상으로 넓힐 것을 주장한 선각자들이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바람에 흔들리는 숲속 가파른 오솔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더 올라갔다. 그러자 한국천주교회 창립 5위 이벽을 중심으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 성현들의 이장된 묘소가 나란히 있었다.
위대한 성현들을 뒤로하고 돌계단을 걸어서 50m 정도 내려오면 빙천수 샘이 있다. 오랜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이 없어지고 옛사람들은 모두 떠나 사라졌어도, 빙천수 샘물은 쉬지 않고 바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물소리만이 변함이 없고 깊은 산속 정적을 깨며 옛일을 다시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각 지방에서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천진암에 온 젊은 선비 학자들은 강학회 천주학 학술세미나에 참석해 아침, 저녁으로 이 샘물을 마시거나 세수를 했을 것이다. 빙천수를 둘러싼 바위처럼, 한결같이 솟구쳐 흐르는 빙천수처럼, 그들은 곧 순교자였고, 이 땅에 그리스도교 뿌리를 굳건히 내린 이들이었다.
강학회에서 진사 이승훈 베드로를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게 했고, 그는 돌아와 천진암에서 한양 수표동(광암 이벽 자택)으로 본부를 옮겨 최초의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명례방 김범우 집(현 명동성당)에서 발족한 천주교회 신앙공동체는 17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으로 이어졌고, 여기에서 출발한 젊은 선비 학자들의 신앙 단체는 순교의 피를 뿌리며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켜냈다. 이들은 한국천주교회 탄생의 주역이었다.
앵자봉은 높고 험한 산으로 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첩첩이 싸인 산은 울창하고 짙푸른 녹음이 석양빛을 희롱하고 있다. 천진암에 새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면서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현들의 발자취와 신앙을 되새겨 본 성지순례였다.
글 _ 한문석 요셉(의정부교구 중산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