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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에도 출장길에 잠시 짬을 내어 바르셀로나 인근의 소도시 만레사를 찾았다. 2023년부터 내리 삼 년째 방문이다. 몇몇 지인들이 볼거리로 넘쳐나는 스페인에서 왜 매번 같은 장소를 가느냐고 묻는다. 이 도시에는 무언가 신비한 매력이 있다. 아마도 예수회를 창립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 성인의 영적인 고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적 출세를 꿈꾸는 기사였던 그는 한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경을 넘긴 후 재활의 무료함을 달래러 기사 소설을 찾았으나 구하지 못하자 대신 「예수의 삶」과 성인 열전인 「황금빛 전설」을 읽었다. 그리고 ‘왕의 기사’에서 ‘하느님의 기사’가 되기로 삶의 목표를 바꾸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바르셀로나 항구로 가는 길에 만레사에 들러 11개월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고행과 영적인 체험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영신수련」 초고를 완성했다. 만레사를 이냐시오 성인의 ‘초기 교회’로 그리고 ‘예수회의 요람’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중요한 성지이므로 전 세계에서 순례객이 찾아오며 한국 신자들의 발길도 잦은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 ‘성 이냐시오 동굴’ 한 군데만을 둘러보고 떠난다. 이냐시오 성인이 자주 기도와 명상을 했으며 「영신수련」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다. 그러나 만레사는 이냐시오가 거의 일 년 동안 머물렀던 도시이기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는 장소들이 많다. 한 관련 사이트(covamanresa.cat)에 의하면 모두 22곳에 달한다. 도보로 가기에는 좀 먼 곳도 있으나 대부분 도시 앞을 흐르는 카르데네르 강가와 마요르 광장 주변의 구시가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장소가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방치된 곳도 꽤 된다.


그중 하나가 강과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도시 외곽의 한 언덕 위에 조성된 야외 조형물인 ‘빛의 우물(Pozo de Luz)’이다. 이냐시오가 ‘대 조명’이라 알려진 엄청난 깨달음의 은총을 받은 장소에 세워졌다. 이냐시오는 말년에 3인칭으로 기술한 자서전 「순례자」에서 관련 일화를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수많은 사안들, 영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신앙과 학문에 관련된 것들을 이해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모든 것이 새롭게 여겨질 만큼 놀라운 조명이었습니다. (...) 그렇게 예순 두 해가 지날 때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도움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합쳐도 그 단 한 번의 순간에 얻었던 깨달음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El Peregrino」, Ediciones Mensajero 참조)


이 영적인 체험은 이냐시오의 측근과 전기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언급하는 만레사 체류의 ‘하이라이트’이다. 필자가 보기에 ‘성이냐시오 동굴’ 못지않게 중요한 성지이다. 이곳에 2008년 철제로 된 기념 조형물인 ‘빛의 우물’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조형물의 형태가 추상적인 데다가 외지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 지역 주민들조차 장소의 의미를 모르는 듯하다. 주변에 쓰레기가 난무하고 술병까지 뒹굴고 있다. 순례객이 남긴 흔적일 리가 없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으로 보아 어쩌다의 관리부실은 아닌 듯하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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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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