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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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치를 역행하는 삶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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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명예를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의 끝이 어떠한 지를 이 땅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방주의 창을 활짝 연다. ‘순교자 성월’이다. 교회는 순교의 개념을 ‘적색 순교’에서 창조 세계를 보존하는 지향으로 살아가는 ‘녹색 순교’, 또 삶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인내하며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는 ‘백색 순교’로 확장하여 이해한다.


올해 우리는 이 확장된 순교의 의미를 세상에서 몸소 살다가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중, 안동교구 두봉(레나도) 주교 그리고 서울대교구 유경촌(티모테오) 주교의 삶을 기렸다. 세 분의 발자취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단순한 감동을 넘어 우리 각자가 품은 지향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초대하는 ‘선물’이 되었다. 백색과 녹색을 아우르는 순교의 삶으로 가난한 자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살아가신 분들이기에 언젠가 성인으로 공경받아 선한 일을 지속해 나가는 이들을 위해 전구를 구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적색 순교로 땅을 적신 박해 시대, 최초의 조선대목구장으로 파견된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끝내 이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였다. 프랑스 카르카손-나르본교구 레삭 도드가 고향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23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1820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태국 방콕의 샴대목구에서 사목하던 당시, 심각한 사목 공백을 겪고 있었던 조선교회 신자들이 사제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접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인력과 재정 부족을 이유로 조선 파견을 꺼렸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원했다. 그는 결국 1831년 교황청 포교성성의 칙서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중국 마가자에서 여정을 준비하던 중 1835년 뇌출혈로 선종했다. 향년 43세. 짧은 생애였지만 한계와 위험을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순교의 땅으로 향한 그 믿음이 놀랍다.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또 마치 그 혼처럼”(「사목헌장」 40항) 지금도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의 구성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필자는 수도회 역사서 편찬 작업을 하면서 현재 시복시성 과정 중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구를 청했다. 낯선 자료를 찾아 재해석하고 편집하는 작업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선교지를 향한 연민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지닌 브뤼기에르 주교를 떠올리며 기도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길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곧 떠날 것처럼’ 살았던 조선 첫 주교의 발걸음은 낯선 땅에서 역사서 작업을 하는 필자에게 용기가 되었다.


한 번은 영국에서 자료를 찾던 중, 모든 것이 멈춘 듯 막막한 밤을 맞았다. 간절한 기도로 성모님과 브뤼기에르 주교께 청원한 뒤 어렵게 잠이 들었는데, 경당 창문이 연둣빛으로 가득 차 성체 앞에 앉아 있는 필자를 향해 다가왔다. 꿈이었다. 그윽한 빛 속에서 깨어난 이른 새벽, 문득 떠오른 자료실에 있는 문서 상자 하나를 열었을 때 초기 역사를 담은 편지들이 보였다. 이미 확인했었는데, 처음 그 귀한 자료를 마주했던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것이 성모님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전구로 인해 비춰 주신 ‘생명의 빛’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당신 닮은 선한 이들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를 당신 자리로 초대하신다. 돈이면 다 된다는 가치관으로 사는 현대인들에게 ‘증거자’로서의 삶의 모델이 절실하다. 함께 걷는 길에는 희망이 있다. 매 순간 선택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복음의 가치로 응답하기 위해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자.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성인이 되자. 그래서 당당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라고 고백하면 어떨까.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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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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