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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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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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소 데 오헤다(1466~1515)라는 스페인 정복자가 있었다. 콜럼버스에는 미치지 못하나 신대륙 초기 정복사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다. 스페인에서 풍부한 전쟁 경험을 쌓은 후에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 주교의 추천으로 콜럼버스의 2차 항해(1493년) 때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콜럼버스 아래에서 ‘라 에스파뇰라섬’(오늘날의 도미니카와 아이티공화국) 정복에 앞장섰으나 이후 왕실과 독자적인 협약을 맺고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그는 체구는 작았으나 용감하고 겁이 없는 사람이었다. 라 에스파뇰라섬에서 스페인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 족장을 적진 한가운데로 찾아가 도금한 수갑을 팔찌 선물이라고 속이며 ? 원주민들은 수갑의 용도를 몰랐다 - 스스로 차게 만든 후에 체포해 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고 호전적이기도 했다. 황금과 노예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을 학살했으며 심지어는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현대 역사학자 휴 토마스의 인물평에 의하면 ‘야망과 잔혹함의 화신’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헤다는 소문난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다. 스페인을 떠나올 때 폰세카 주교가 안전을 기원하며 선물로 준 성모상을 늘 군장 안에 넣고 다녔으며 자나 깨나 곁에 두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수없이 사선을 넘으면서도 죽지 않았으며 심지어 크게 다치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성모의 기사’라 불렀다.


한편, 그는 스페인 정복자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말년에 과거를 뉘우치고 회심한 사람이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510년 그를 태운 배가 허리케인을 만나 쿠바 남부 해안에서 좌초했다. 오헤다는 폭풍우 속에서 악전고투하면서도 성모상만큼은 챙겨서 탈출했다. 그는 굶주림과 질병을 견디며 수일간 위험으로 가득한 습지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성모님께 빌었다. 만일 살려주신다면 가장 먼저 발견하는 마을에 성모님을 위한 경당을 세우겠노라고.


마침내 한 우호적인 원주민 족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오헤다는 그동안 지니고 다녔던 성모상을 원주민들에게 건네주고 마을에 작은 경당 하나를 세웠다. 그리고 라 에스파뇰라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왕실이 부여한 모든 직책과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고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들어가 참회하며 생애 마지막 5년을 보냈다. 죽을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은 재산을 기부했다. 또한 속죄의 의미로 자신을 수도원 출입문 밑에 매장하여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필자는 오헤다가 진짜 ‘성모의 기사’가 된 것은 그의 생애 마지막 5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 군장에 넣어 다니던 성모상은 진짜 성모님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부적’에 지나지 않았다. 등 뒤에 성모님을 모시고 어찌 눈앞으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불태워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진짜 성모님은 군장 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계셨다. 오헤다는 그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필자의 연구실은 성상으로 가득하다. 성모상도 여럿이다. 스페인, 중남미를 다녀올 때마다 현지의 성모상을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그리되었다. 남들이 보면 ‘성모의 교수’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솔직히 자문해 본다. 과연 내 마음속에 성모님이 모셔져 있는가? 답하려니 낯이 뜨거워진다.



글 _ 전용갑 요셉(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스페인어통번역학과 교수, 세계문학비교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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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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