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밀라노 암브로시우스 대성당에 있는 성 암브로시우스의 유해(가운데). 양쪽에 각각 모셔진 분은 2세기 밀라노에서 순교한 제르바시우스(Gervasius)와 프로타시우스(Protasius) 성인이다. 출처 : 월간 꿈CUM
옛날 옛적, 간신히 박해의 겨울 터널을 통과한 교회가 이제 막 신앙의 자유를 누리던 때였다. 서기 340년, 암브로시우스는 그 신앙의 봄에 독일 트리어(Trier, 트리엘)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지적 성취를 보였던 그는 성장한 후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탁월한 사람은 언젠가는 주목받기 마련이다. 뛰어난 학식과 언변을 가진 그를 로마 정치권에서 주목하기 시작했고, 암브로시우스는 마침내 밀라노 총독 자리에 오른다. 오늘날로 말하면 법조계에서 주목을 받다가, 정치권에 의해 발탁돼 도지사에 당선된 상황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종교계의 수장으로 급부상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 과정은 이렇다.
당시는 그리스도교 교리가 정립되지 않아, 그에 따른 이단이 속출하던 시기였다. 이때 밀라노 주교가 갑자기 사망했다. 곧이어 후임 선발 작업이 이뤄졌는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잡음이 일었다. 아리우스 이단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밀라노 주교 자리를 노리고 나선 것이다. 주교 자리를 놓고 정통파와 아리우스파가 양쪽으로 갈라져 치고받았다. 이 혼돈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것은 민중이었다. 민중은 복잡한 삼위일체 교리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훌륭한 신앙과 인품, 공명정대함을 가진 인물이 주교가 되길 원했다. 이때 민중은 정통파 암브로시우스를 떠올린다.
전설에 따르면 암브로시우스가 종교 다툼이 벌어진 현장을 찾아 화해 설득에 나섰을 때 성령에 휩싸인 한 어린이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신호탄이었다. 군중이 함께 발을 구르며 외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님! 암브로시우스 주교님!”
당황한 암브로시우스는 손사래를 쳤다. 왜냐하면, 당시 그는 세례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은 멈추지 않았다. 거듭 주교 착좌를 요구하며, 소란을 피웠다. 소란이 소요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자 암브로시우스는 친구 집으로 피신했는데, 사람들은 숨어있던 암브로시우스를 찾아내 다시 주교직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암브로시우스가 얼마나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민중이 원하자밀라노 교구 사제들과 인근 지역 주교들도 암브로시우스에게 주교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민심이 곧 천심. 암브로시우스는 374년 12월 7일 34세가 되던 해에 세례성사를 받고 주교직에 오른다. 암브로시우스는 주교가 된 후, 모든 열정을 다해 직무에 임했다. 기도와 교리연구, 강론에 전념했는데, 가는 곳마다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는 단식을 실천했으며,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특히 신앙을 신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사와 전례에 대한 그의 저술은 오늘날 교회를 가능하게 한 초석이 된다.(암브로시우스의 전례학 등 신학 관련 세부 내용은 이곳에서 생략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자선 실천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주었으며, 죄인을 따뜻하게 대했으며, 이단 추종자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교회의 큰 기둥을 발굴, 양성했다.
성녀 모니카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찾아와 눈물 흘리며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말했다. “안심하시오. 이런 눈물을 가진 어머니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적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와의 대화를 통해 회개하고 가톨릭 교회의 영웅이 된다. 출중한 지식인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조차 무릎 꿇린 것을 볼 때, 암브로시우스의 지적 성취와 영적 깊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가 교회의 뿌리내림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서기 390년, 테살로니카 사람들이 로마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격분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군대를 파견, 반란에 가담한 7000여 명을 몰살한다. 황제는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잔인성을 그냥 간과할 수는 없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즉각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통회와 보속, 고행을 권유했고, 통회하지 않을 경우 성당에 나올 수 없다고 밝혔다. 황제는 처음에는 반발했으나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다. 영적인 힘이 정치적 힘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교회가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고, 그의 노력으로 교회는 당분간 세속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마지막 날, 암브로시우스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황제는 로마의 주교,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예루살렘의 주교가 아니라, 밀라노의 주교 품에서 죽었다. 생의 끝자락에서 황제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내게 진리를 말해준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하느님의 일꾼,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