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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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에 가장 소중한 친구

[월간 꿈 CUM] 꿈CUM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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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문학의 집’ 행사가 있어 3호선 전철을 타고 가다가 재미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양재역을 지나는데, 한 노파가 들어와 내 옆에 앉으며 대뜸 하는 말. 
“아이고, 시원하다. 하루 종일 전철만 타고 지내면 좋겠구먼. 더워도 너무 더워.”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아니 한 바가 아니어서,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응수했더니, 여인은 이야기를 계속 한다. “할 일이 많으니, 전철만 타고 있을 수도 없고.” “무슨 일이 그렇게 많으세요?” “교회도 나가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운동
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시도 외워야 하고….”

시도 외워야 한다는 마지막 말에 적이 놀라,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었더니 80이란다. 나는 더욱 흥미가 당겨 무슨 시를 외우시느냐고 물었다. 그네는 “구약 시편의 시도 외우고, 우리나라 서정시도 외우지요” 하면서 시편 중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로 시작하는 23편을 줄줄 암송한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즐겁게 들어 주자, 영어로도 외운다며 바로 그 부분을 줄줄 외운다. 발음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술술 흐른다.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노인은 더욱 신이 난 듯 우리나라 현대시를 꺼낸다. 맨 처음 조지훈 선생의 ‘승무’가 주루루 쏟아져 나왔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

후유! 정확히 끝낸다. 오히려 문학인인 나는 중간 중간 생각이 안 나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노인은 그 긴 시를 술술술 물 흐르듯 외워버린다. 세상에….

“정말 대단하시네요. 문학 전공하셨나요?”

“아니요. 그냥 좋아했어요. 문학이 얼마나 좋아요. 특히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에겐 최고지요. 좋은 책 읽거나 시 외우고 있으면 세상 근심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져요. 부자가 따로 있나요. 나는 젊어서도 시를 많이 외웠지만 요즈음 더 열심히 외워요.”

“젊을 때와 달라서 잘 안 외워지시지 않던가요?”

“아니요, 오히려 속도가 붙어서 사흘이면 한 편씩 외워요.”

“네? 사흘 만에요?”

“치매 안 걸리려면 시 외우고, 노래 부르고, 이런 게 아주 좋대요.”

그렇게 말하고는 또 소월을, 영랑을, 목월을 줄줄 읊어댄다. 내가 중간 중간 끼어들어 함께 소리를 맞추자 더욱 신이 나서 계속 외워대다가 묻는다.

“당신도 문학 좋아했우?”

“네. 아주 좋아해요. 지금 충무로 ‘문학의 집’ 행사에 가는 겁니다” 하며 문학의 집에 대한 소개를 잠깐 했더니, 그렇게 좋은 곳이 있었냐며 기뻐한다. 문학은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준다고. 무엇보다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마음을 순화시켜 준다고. 좋은 시 외우고 있으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문학 장려 운동을 펼쳤으면 좋겠다고. 노인의 목소리가 제법 크고 또렷해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노신사에게도 들렸는지 그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곧 내가 내릴 충무로역이 나왔다. 노인에게 ‘행복하십시오’ 인사하고 내리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산뜻한 만남이라 나도 행복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독서의 생활화를 역설할 때마다 새로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사고력과 문장력 증진, 인생의 길잡이 역할 모델 만남, 등등 이미 알려진 것 외에 내가 삶에서 체득한 중요한 항목이라며 꼭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다. “노후에 가장 소중한 친구!”

몸 아프고 다리 아파, 외출할 수 없어질 때, 끝까지 나를 지키며 함께 놀아줄 친구 문학. 그런데 다 늙은 다음에 새로 사귈 수는 없다. 젊어서부터 독서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책과 친구 될 수 있겠는가. 대부분 한두페이지 읽다가 눈 아프다고 팽개쳐 버린다. 그러니 일찍부터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러한 설명으로 독서의 생활화를 강조하면 젊은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준다.

요즈음 혼자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할 일 없는 노인들은 그 외로움을 어떻게 견딜까. 건강할 때는 나들이라도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지만 아플 때는 그 쓸쓸함이 오죽하랴.

몇 년 전 여름, 버스를 타려고 뛰다가 왼발을 접질려 깁스를 하고 50일을 지낸 적이 있다. 그 막막함이라니! 그때 나는 오디오 성경을 듣고,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축축한 무더위를 이기고, 심심함을 달랬다. 고맙고 고마운 문학!
그런데 전철에서 만난 노인은 나보다 한 수 더 높았다. 단순한 독서 차원을 넘어서 ‘시 암송’이란 새 지평을 열어 보이지 않았는가. ‘노후에 가장 소중한 친구’ 라는 나의 발견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듯이.

앞으로 독서도 힘들게 될 때를 생각해, 젊은 날 숱하게 외웠던 애송시들을 찾아 즐거운 여행을 떠나 봐야겠다.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수원교구 분당성요한본당)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만남, 그 신비」, 소설집 「가을, 그리고 山寺」 「가슴에 묻은 한마디」 「비밀은 외출하고 싶다」, 수필집 「아름다운 귀향」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나의 문학, 나의 신앙」, 시집 「한 송이 풀꽃으로」,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2023년 9월,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로 ‘황순원 문학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협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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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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